본문 바로가기

소설8

곰문곰문: 모달리티의 중첩 몇 년 전 인터넷에서 화제가 되었던 '곰문곰문'에 관해 생각해 볼 기회가 우연히 생겼다. 생각보다 지적인 자극을 유발하는 지점이 있어, 다른 곳에 작성한 글의 일부를 빼와 이곳에 정리한다. 곰문곰문 다음은 몇 해 전 SNS 등 온라인상에서 잠깐 화제가 된 적이 있는 웹 소설의 일부입니다. (‘노벨피아’라는 플랫폼에 올라온 야한 소설이라고 하는데, 아무리 찾아도 제목이 나오지 않습니다.) 내용은 일반적인 웹소설과 별다를 바 없어 보이지만, 마지막 줄만큼은 아주 참신합니다. 주인공이 죽인 곰이 비탈길 아래로 굴러 떨어지는 장면을 ‘곰 문 곰 문 …’으로 표현한 것이죠. 텍스트와 이미지의 묘한 경계에 위치한 ‘곰 문 곰 문…’은 문자의 한계를 뛰어넘어 독자로 하여금 어떤 이미지를 상상하게 합니다. 180도 회.. 2024. 3. 18.
[소설] 물고기의 언어 요즈음 수민의 가장 큰 고민은 큰 어항을 새로 하나 사는 것이다. 그녀는 죽은 물고기들을 그곳에 모아둘 생각이었다. 모두 그녀의 친구들이었다. 그녀는 그녀의 친구들이 땅에 묻히기도 원하지 않으며, 그들의 시체를 변기에 떠내려 보내기도 원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렇게 시체를 떠나보낼 때마다 다른 물고기들의 원성이 자자했기 때문이다. 땅에 묻어주는 것은 확실히 인간의 방식이었고, 변기 물에 떠내려 보내는 것은 더 확실한 인간의 방식 -그것도 똥이나 오줌을 처리하는 - 방식임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물고기들은 그래서 땅에 묻히는 것을 그나마 더 선호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방식이 명예롭거나 아름다운 삶의 마무리라고 여기지는 않았다. 그렇게 떠나보낸 친구가 벌서 열일곱이었다. 수민은.. 2020. 3. 22.
박성연을 위한 서사 누군가의 정액이 누군가의 자궁 속에 들어가 난자와 정자가 만나게 되었던 일이 있었다는 사실을 그 무엇보다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은 저의 존재 그 자체이겠지요. 적어도 저의 존재로 인해 인간 탄생 과정의 시작점이 제가 이 세상에 태어나기 약 열 달 쯤 전에 최소 한 번 발생했다는 사실은 알 수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저의 존재가 사라지면서 증명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아마도 제가 한 때 존재했었다는 사실 그 자체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 말고는 없는 것 같습니다. 저라는 사람이 애초부터 없었다면, 제가 없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는 방법조차 없기 때문이지요. 마치 성경에 나오는 신처럼요. 신은 있는 줄도, 없는 줄도 모르니까 도무지 있었다더라, 없었다더라, 하는 이야기 자체가 성.. 2019. 11. 26.
교차로 6시에 일어난다. 일어나서 세수를 하고, 운동을 하고, 밥을 먹고, 도서관에 갔다가, 하루종일 공부를 하고, 아, 중간에 도서관 구내식당에서 밥도 먹고(거기 돈까스가 참 맛있다), 밥 먹으면 이도 닦아야지, 다시 공부하고, 집에 돌아와서 유튜브 좀 보다가, 그러다 자고, 다시 6시에 일어난다. 이것은 그, 혹은 그녀가 잠들기 직전에 세운 나름의 계획이었다. 이것이 그녀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그는 몰랐다. 아마 그녀 자신도 몰랐을지 모른다. 어찌 됐든 간에, 그녀는 다음날 아침을 위하여 일찍 잠을 청했다. 몇 번 뒤척이더니 머리맡에 놓인 휴대전화를 들어 알람을 맞추고, 다시 끄고, 아 맞다, 화장실 불 안 껐다, 다시 일어나서 갔다가, 간 김에 볼일도 보고, 일어난 김에 물도 좀 마시고, 다시 돌아오니 .. 2019. 8. 17.
[소설] 렛미인: 소극적 반달리즘 외로운 소년과 뱀파이어 소녀가 만나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를 담은 욘 A. 린드크비스트의 「렛미인」은, 그 기괴하고 어두운 배경과 맞물려 「트와일라잇」같은 보통의 뱀파이어 소설과는 구별되는 매우 독특한 서사 구조를 형성하면서도 미성숙한 개인이 완전히 다른 누군가를 받아들이며 성장해 나가는 과정을 매우 섬세하게 묘사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 받는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이러한 작품에 대한 주된 해석은 잠시 제쳐두고, 작중에서 은연중에 드러나는 근대화에 대한 작가의 부정적인 인식과, 근대화 과정에서 소외된 개인들의 대응 방식을 간략하게 살펴보면서 작품에 대한 보다 풍부한 해석을 시도해 보려 한다. 이러한 작업은 먼저 서사의 배경이 되는 스웨덴 스톡홀롬의 교외 지역에 위치한 ‘블라케베리’ 라는 도시에 대한 이해가.. 2019. 6. 9.
[소설] 영원한 이방인(Native Speaker) : 언어의 냉소 이창래의 『영원한 이방인』은 원제인 “네이티브 스피커(Native Speaker)”가 암시하듯, ‘언어’에 대해 다루는 소설이다. 550쪽이 넘어가는 소설에 대한 평 치고는 지나치게 단순한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사실 이 소설에서 언어라는 것이 함축하는 의미는 굉장히 다층적이고 복합적이다. 그것은 이 작품이 언어를 그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우리의 삶 깊숙한 곳에 실재하는 현상으로 바라보고 서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언어는 의사소통의 수단이자 우리가 우리 주변의 세계를 인식하고 표현하는 도구이다. 이러한 설명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이처럼 사전적인 서술에 불과한 문장으로는 언어를 완전히 표현했다고 할 수 없다. 차라리 언어가 인간의 삶 자체라는 설명, 인간의 삶을 그대로 비추는 거울 같은 것이.. 2019. 4. 29.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