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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소설] 물고기의 언어

by 고우 2020. 3.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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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 수민의 가장 큰 고민은 큰 어항을 새로 하나 사는 것이다. 그녀는 죽은 물고기들을 그곳에 모아둘 생각이었다. 모두 그녀의 친구들이었다. 그녀는 그녀의 친구들이 땅에 묻히기도 원하지 않으며, 그들의 시체를 변기에 떠내려 보내기도 원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렇게 시체를 떠나보낼 때마다 다른 물고기들의 원성이 자자했기 때문이다. 땅에 묻어주는 것은 확실히 인간의 방식이었고, 변기 물에 떠내려 보내는 것은 더 확실한 인간의 방식 -그것도 똥이나 오줌을 처리하는 - 방식임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물고기들은 그래서 땅에 묻히는 것을 그나마 더 선호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방식이 명예롭거나 아름다운 삶의 마무리라고 여기지는 않았다. 그렇게 떠나보낸 친구가 벌서 열일곱이었다. 수민은 아직 죽지 않고 살아있는 물고기들과 함께 한동안 이 문제에 대해 의논하다가, 그러면 너희들이 죽은 이후에 다른 어항으로 옮겨 두는 것은 어떠냐고 물어보았다. 물고기들의 반응은 괜찮았다. 깨끗하기만 하다면 - 이것이 유일한 조건이었다 - 괜찮다는 것이었다. 물 위에 둥둥 뜨느니, 자신들의 몸이 결국엔 썩느니, 하는 것은 그들에겐 부차적인 문제였다. 그들은 그저 물고기답게 죽기를 바랐다.

수민과 물고기의 인연은 그녀의 남편이 죽은 뒤부터 시작되었다. 그녀의 남편은 말을 할 줄 몰랐다. 수민은 말을 더듬었다. 그녀의 남편은 그녀가 말을 건네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럴 때가 아니면 그녀는 다만 마트나 편의점에서 무언가를 살 때 겨우 입 밖에 몇 마디를 꺼내곤 했다.

“어, 어, 얼마예요?”

“가, 가, 감사합니다.”

돈이 많았던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가 평생 말더듬이로 살게 할 수는 없다며 어릴 적부터 그녀를 데리고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아동 발달 치료 어쩌고가 적힌 곳들이었다. 그녀는 그곳의 선생님들과 즐겁게 놀았다. 그림도 그리고, 악기도 배웠지만 말 더듬는 증세가 사라지지는 않았다. 그녀의 언어는 너무나도 느렸다. 그녀는 자신의 언어를 이미 그녀에게 주어진 운명 그 비슷한 무언가로 받아들이고 있었으므로, 오히려 그녀의 아버지를 위로했다.

“마, 말을 자, 잘, 하는 거, 보다, 자, 잘 듣는, 게, 주, 중요해.”

아버지는 그런 그녀의 눈을 한참 바라보더니 그녀를 쓰다듬고선 꽉 껴안았다. 기특하구나, 착한 내 딸. 수민은 숨이 막혔지만 말하지 못했다. 그렇게 그녀가 병원과 아동심리상담센터를 전전하는 일도 끝났다.

수민은 자라나 속기사가 되었다. 속기사는 완벽한 직업은 아니었지만 그녀의 삶에 적당했다. 일단 일 하는 도중 말할 일이 없다는 점에서 그녀의 적성에 맞았다. 사람들은 말로 싸웠지만 그녀는 귀와 손가락으로 그녀 자신과 싸웠다. 그래서 그녀는 참 다행이라고 여겼다. 그녀는 학창 시절 자신을 괴롭혔던 아이들의 모습을 떠올렸고, 언어가 그녀를 향하지 않고 다만 그것을 관조할 때, 마치 강 건너 불구경처럼 얼마나 흥미롭고, 때로는 평안한 것이 되는지에 대해 생각하곤 했다.

그녀는 자신의 삶에 만족하면서 살았으나 외로움을 느꼈다. 특히 서른이 되어 아버지가 죽은 뒤에 그녀는 비로소 세상에 꽤 많은 유산과 함께 홀로 남겨졌다는 것을 깨닫고 큰 충격에 빠졌다. 그녀는 아버지와 어릴 적 자주 갔던 종로 길거리를 배회했고, 매일같이 같은 자리에서 바순을 연주하고 있던 그녀의 남편을 만나 사랑에 빠졌다. 그리고 오래 지나지 않아 결혼했다.

“자, 잘, 하, 하시네요. 아, 악기, 이름이, 뭐, 뭐예요.”

그녀의 서투른 언어를 남편은 주의 깊게 천천히 들었고, 주머니에서 펜과 노트를 꺼내 ‘바순’이라고 큼직하게 적어서 보여주었다.

“바. 순.”

수민은 노트를 보고 그대로 따라서 읽었고, 그 발음이 너무도 또렷하고 정확해서 수민 스스로가 놀랐다. 바순. 그때부터 그 단어는 그녀가 주저하지 않고 말할 수 있는 단어가 되었다. 그녀 남편의 이름보다도 더.

남편 상희는 착한 사람이었고, 그녀의 말이 끝날 때까지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이었다. 말할 줄 모르는 사람이 바순이라는 악기로 돈을 벌기엔 쉽지 않았지만, 그런 것은 수민에겐 아무래도 좋았다. 수민은 자신이 물려받은 꽤 많은 돈을 어디에 써야 할지 정확히 깨닫게 되었고, 둘은 그렇게 결혼을 해 한 집에서 살기 시작했다. 상희는 라이브 바 비슷한 곳을 전전하면서 바순 연주를 해댔고, 어떤 날은 거나하게 취해 들어와 수민에게 입을 맞추곤 했다. 그의 입은 자꾸 웅얼대는 소리를 냈지만 말을 하진 못했다. 그래도 수민은 꼭 상희의 말이 들리는 것만 같았다. 손님이 자꾸 술을 줬어, 오늘 하루 너무 힘들었어, 너무 보고 싶었어, 따위의 말들. 과연 상희는 수민보다 어렸던 걸까, 어린 동생이 누나에게 하는 것 같은 말들이 가득했다. 으, 응, 그, 그랬구나. 하면서 맞장구도 쳐줬다. 꼭 안아주기도 했다. 그러면 상희는 그녀의 품에 안기며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수민에게 달라붙어 떨어질 줄을 몰랐다. 수민은 상희의 술냄새가 싫었지만, 그런 상희가 싫은 것은 아니었다. 수민은 상희가 몸만 다 큰 애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그러나 그것조차도 어른스러움의 일종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말 못 하는 장애인이 라이브 바, 재즈바를 전전하며 연주를 하며 벌어먹고 사는 것이란 어떤 것인가, 그것은 필시 술에 취한 손님들의 온갖 멸시와 환호성을 온몸으로 받아내는 어떤 것이었음이 틀림없으리라. 분노의 숨을 악기 속으로 불어넣어 기쁨의 노래로 승화시키고, 조명이 자신의 얼굴을 잠깐 비추는 순간 온갖 역겨운 감정을 연주의 일부인 것마냥 얼굴에 표현하는 것이었으리라. 수민은 종로의 골목골목을 가득 채우고서 라디오로 뽕짝을 틀고, 춤을 추고, 술에 취해 바둑이며, 장기를 두는 노인네들을 생각했다. 세상의 온갖 풍파는 본인들이 다 겪은 것처럼 여기는(그러나 그렇게 여길 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 수민은 종로가 상희 같이 감수성 풍부한 사람에겐 너무나도 무서운 곳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상희는 술집에서 난 싸움에 휘말려 들어 술병에 머리를 맞고 죽었다.

상희가 죽은 뒤 수민은 한동안 잠잠히 지냈다. 그것은 그녀 나름으로 슬픔을 삭히는 방법이었다. 그녀는 소리 내지 않고도 많은 일들을 능숙하게 해냈고, 슬퍼하는 것도 그중 하나였다.

남편의 악기엔 피와 술이 묻어있었다. 그녀는 남편의 시체를 어루만지듯 악기를 헝겊으로 조심히 닦았다. 그래도 얼룩이 완전히 지워지진 않았다.

“바. 순.”

수민은 자신의 입술에 리드를 갖다 대고 바람을 불어보았다.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별안간 수민은 악기를 껴안은 채 거실 바닥에 엎드려 끅끅대며 울었다. 그녀는 악기를 한번 더 닦아야 했다. 그 뒤로 수민은 울지 않았다. 다만 남편과 남편의 물건을 모두 태워버린 후 거실 한쪽 벽의 바순 케이스를 바라보면서 종종 생각에 잠길 뿐이었다.

그녀의 삶이 상희를 만나기 이전처럼 변해갈 즈음, 그녀는 주위의 말소리를 따라 손가락이 저절로 움직이는 것을 느꼈다. 가상의 키보드에 타이핑을 해대는 것이었다. 멈추려 해도 멈출 수 없어 귀에 이어폰을 꽂고 큰 음악을 틀어야 했다. 실수로 노래가 나올 때면 노래 가사를 따라 손가락이 움직이기 전에 황급히 다른 곡으로 넘기곤 했다. 그녀는 자신이 받아쓰기 기계가 되어버린 것이라고 생각했다.

수민은 늘 그랬듯 바순 케이스를 바라보면서 생각에 잠겼고, 소리 없이도 아름다운 것을 찾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것은 분명 상희였으나, 상희는 이 세상에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수족관에서 금붕어 한 마리를 샀다. 대형마트에서 예쁜 어항도 하나 샀다. 어항을 꾸밀 만한 모형 해초, 조약돌 같은 것들도 샀다. 그녀는 오랜만에 미소를 지었다.

수민은 금붕어를 정성껏 돌봤다. 금붕어의 꼬리는 날이 갈수록 점점 더 화려해져 갔고, 수민은 만족했다. 그녀는 매일같이 어항의 물을 새 것으로 갈았고, 밥도 빼먹지 않고 꼭 줬다. 그녀는 금붕어 먹이의 쿰쿰한 냄새를 좋아했다. 어떤 맛인지 궁금증을 유발하는 냄새였다. 그녀는 알갱이 하나를 혓바닥에 갖다 댔다가 바로 뱉어냈다. 나중엔 그 맛에 중독되어 금붕어 밥을 줄 때 그녀 자신도 한 알씩 먹곤 했다. 좁쌀만 한 알갱이 일곱 알이면 금붕어는 하루를 살았고, 번쩍이는 지느러미를 유유히 흐드리고선 별생각 없이 어항 안의 모형 해초를 입으로 툭툭 건드리며 시간을 보냈다. 수민은 그런 금붕어를 바라보며 불을 켠 채로 잠에 빠지곤 했다. 그러면 눈을 떴을 때에도 금붕어는 그녀 앞에서 유유히 헤엄을 치고 있었다. 수민은 어항을 어루만졌고, 유리 표면에 남은 손자국을 지운다는 핑계로 헝겊으로 한번 더 어항을 감싸 안았다. 마음만 같아서는 금붕어를 껴안고 싶었다. 그러나 그러기에 금붕어는 너무 작고 미끄러웠다.

금붕어를 집 안에 들인 지 일 년 육 개월이 조금 넘었을 때 금붕어는 죽었다. 수민은 물 위에 배를 드러내고 둥둥 떠 있는 금붕어를 한동안 바라보지 못했다. 그녀는 국자로 금붕어를 퍼내어 변기 물과 함께 흘려보냈다. 금붕어는 둥그런 물살을 타고 유유히 사라졌다. 수민은 한동안 변기 물을 바라보다가 어항을 깨끗이 헹궜다. 그날 밤 그 어항엔 새로운 금붕어가 들어왔다.

금붕어의 죽음 이후, 수민은 자주 불안한 마음이 들어 밤중에도 몇 번씩 깨곤 했다. 그럴 때면 그녀는 팔짱을 끼고서 거실을 빙빙 돌아다녔다. 거실 탁자를 한 바퀴 돌 때마다 바순 케이스가 눈에 들어왔다. 그래서 그녀는 금붕어를 여러 마리 샀다. 모두에게 같은 어항과 같은 모형 해초, 같은 조약돌들이 주어졌다. 그녀는 금붕어가 늘어난 만큼 더 많은 노동을 해야 했지만, 조금은 안심이 됐다. 열 마리가 넘는 금붕어가 하루아침에 죽을 일은 없을 테니까. 그녀는 한쪽 벽의 물건들을 완전히 치워버리고 어항들을 일렬로 놓아두었다. 그녀는 흡족해했다.

물고기들이 말을 걸기 시작한 것은 그때쯤이었다.

“야. 물이 너무 차갑잖아.”

어항 물갈이를 할 때였다.

수민은 자신이 드디어 미쳤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금붕어와의 대화는 나름 유익했다. 그들은 많은 것을 알고 있진 않았지만, 그들 자신에 대해선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래서 그들이 내뱉는 즉각적인 반응들에 수민은 귀를 기울였다. 물이 차갑다, 배가 고프다, 답답하다, 등등. 그러면 수민은 가끔은 어항의 위치를 옮기기도 했고, 밥을 주기도 했다. 금붕어들은 그제야 좀 편안하다고 말했고, 수민도 편안한 마음으로 잠에 들 수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수민은 그들과 점점 더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되었다. 그녀는 금붕어들에게 이름을 붙여주었다. 그랬다가 욕을 먹었다.

“니가 뭔데 우리 이름을 마음대로 정해?”

타당한 말이라 수민은 그들의 이름을 물어보았다.

최영희, 이정흠, 최상유, 김지원, 이해완, 이성은, 조승연, 이규현, 박상희, 박수현.

“나, 나는, 니, 니모, 이, 이런 걸 줄, 아, 알았, 어.”

수민은 너무나 평범한 이름들에 약간은 놀랐다. 그리고 그중에 상희가 있다는 것이 조금은 기뻤다. 그래서 수민은 가끔 다른 금붕어들 몰래 상희에게 좀 더 비싼 먹이를 주곤 했다. 물론 상희 자신도 몰랐다.

남편 상희와 달리 금붕어 상희는 말이 많은 편이었다. 그는 잠들기 전까지 쉴 새 없이 말을 해댔다. 그렇지만 물고기의 언어는 소리가 없는 것이었으므로 수민의 손가락이 말소리를 따라 움직이는 일은 없었다. 수민은 피곤이 쏟아져 눈이 감기는 와중에도 상희의 말에 반응해주었다. 그랬어? 그랬구나.

시간이 지나 물고기들은 하나 둘 죽어가기 시작했다. 그때마다 수민은 변기에 죽은 금붕어를 흘려보냈고, 어항엔 새로운 금붕어가 들어왔다. 그럴 때마다 환영회 비슷한 것도 열렸다. 자기소개 시간을 갖고 만나서 반갑다는 인사를 나눴다. 상희는 꽤 오래 살았지만, 점점 목소리에 기운이 없어져갔다.

“내가 죽을 날도 얼마 안 남은 것 같아.”

“그, 그러게.”

물고기들은 수민이 상희를 유달리 아낀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것에 별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라 수민의 죽은 남편 이름이 상희였기 때문이라는 것도 그들은 알고 있었다. 수민은 그 정도로 물고기들에게 많은 것을 털어놓았으므로. 그렇게 그들은 그들이 죽은 뒤에 갈 새로운 어항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금붕어들은 그것이 상희를 위한 것임을 알았지만, 결국 자신들도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죽음에 있어서만큼은 초연했다.

준비는 조금씩, 착실하게 진행되어 갔다. 수민은 남는 방 하나를 완전히 개조해 냉동고 비슷한 어떤 것으로 바꿨다. 일 년 내내 서늘하고, 환기가 잘 돼서 죽은 물고기들의 비린 냄새가 안나며, 그들이 영원한 안식을 누릴 수 있는 곳. 말하자면 물고기들의 공동묘지 비슷한 어떤 것인 셈이었다. 그녀는 오랜만에 아버지의 유산을 썼다. 금붕어들은 기뻐했고, 누구보다 상희가 행복해했다.

이제 수민은 공동묘지의 한가운데에 둘 큰 어항을 하나 살 생각이었다. 수민은 퇴근하는 길에 수족관에 들러 커다란 어항을 살 수 있는지 알아보러 다녔다. 그녀 마음에 꼭 드는 것을 찾긴 힘들었지만 그러는 와중에도 상희는 계속 기운을 잃어가고 있었기에 마음이 급했다. 그녀는 일단 되는 대로 제일 큰 어항을 샀다. 너무 커서 그녀가 혼자 옮길 수 없었으므로, 사람을 불러 옮기기로 했다.

다음날 그녀는 평소보다 일찍 퇴근해 집안 곳곳을 정리하면서 새 어항을 맞을 준비를 했다. 옮기는 데 방해가 되지 않도록 금붕어들도 다른 벽으로 옮겼다. 상희에게 그가 죽으면 들어갈 어항이 온다고 얘기해줬다. 그는 기뻐했다. 이윽고 초인종이 울렸고, 수민은 남편을 죽인 장본인을 맞이했다.

둘은 한동안 서로를 바라보았다. 이형욱. 술이 깨자 자기가 무슨 짓을 한지도 기억 못 한 사람. 그녀는 잠시 분노에 휩싸였다. 경찰 조사를 할 때 그가 힘쓰는 일을 한다는 것은 들었으나, 이런 식으로 만날 줄은 상상도 못 했던 것이었다. 수민은 잠깐 동안 다시 문을 닫을까 고민하다 상희 생각을 하고선 들어오라 했다.

“어디로 옮길까요?”

“저, 저기, 아, 안, 쪽에, 무, 문, 여, 열린, 방, 이요.”

일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는 낑낑대며 방까지 어항을 옮겼고, 유리에 흠집 나지 않도록 덕지덕지 붙여둔 박스와 박스테이프를 모두 뜯더니 조용히 신발을 신고 밖으로 걸어 나갔다. 그는 거실 한쪽 벽에 잔뜩 모여있는 금붕어들을 힐끔 바라보았다.

“물고기를 많이 키우시나 봐요.”

“가, 가세요.”

수민은 문을 닫으려 했다. 문틈 사이로 형욱이 급히 손을 집어넣었다.

“저, 잠깐만.”

수민은 다시 문을 열었고, 그는 무릎을 꿇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수민은 형욱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역겨웠다. 그녀는 문을 닫아버렸다.

그날 이후로 형욱은 매일 저녁 그녀를 찾아와 문을 두드렸다.

“육 년을 기다렸습니다. 제발 문 좀 열어주십시오!”

물고기들은 동요했다. 수민은 그들을 달래느라 애썼다. 괜찮아, 괜찮아, 별 일 없을 거야. 그러면서도 형량을 줄이기 위해 반성문을 백 장이나 썼다는 형욱의 모습이 자꾸 생각났다. 도대체 이제 와서 그녀를 이렇게 괴롭히는 이유를 그녀로선 알 수가 없었다.

“제, 제발, 가, 가주세요.”

“예. 내일 또 오겠습니다.”

“오, 오지, 마, 마세, 요.”

“용서하실 때까지 매일 오겠습니다.”

이게 매일 저녁의 대화였다. 정말로 수민이 그를 용서하지 않는다면 그는 그녀를 죽일 기세였다. 수민은 만약 용서를 한다 하더라도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당장 내일 그가 죽는다고 해도 형욱에 대한 분노가 사라질 것 같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밤마다 형욱은 무릎을 꿇고 앉아 그녀에게 용서를 구했고, 그녀의 손가락은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를 따라 움직였다. 수민은 처음으로 죽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럴 때마다 그녀는 어항들을 어루만졌다. -너희들은 내가 지켜줄게. 걱정 마.

그가 온 지 한 달째 되던 날, 그녀는 드디어 경찰에 전화를 걸었다. 그녀는 서툰 언어로 자신의 남편을 죽인 사람이, 밤마다 자신에게 찾아온다는 것을 설명했다. 15분쯤 지나 경찰 두 명이 찾아왔고, 형욱을 쫓아냈고, 그 뒤로 한동안 잠잠했다. 상희는 이제 하루 종일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말 많던 상희가 기운 빠진 것에 수민은 마음이 아팠다. 숨 쉬는 것조차 힘들어 보였다. 그녀는 말도 걸지 못하고 어항 밖에서 그와 함께 밤샐 뿐이었다. 수민은 당분간 일을 쉬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녀는 상희의 죽음을 준비했다. 새 어항을 예쁘게 꾸미고, 물도 가득 담았다. 드디어 그날 저녁에 또 한 번 형욱이 찾아왔다.

그는 계속해서 문을 두드렸다.

“문 열어! 문 열어 씨발년아!”

그녀는 그 소리를 애써 무시했다. 하지만 손가락은 계속 움직였다. 그녀는 귀를 막았다. 그녀의 손가락은 그녀의 머리에 대고 타이핑을 하기 시작했다. 참을 수 없었다. 물고기들이 웅성대기 시작했다.

“또 왔네, 또 왔어. 수민아, 어쩔 거야?”

그녀는 일어나서 문을 열었고, 형욱은 문을 벌컥 열더니 그녀를 밀쳐냈다. 수민은 그대로 바닥에 나뒹굴었다.

“이 씨발년. 니가 그렇게 잘났어? 너 때문에 내가 깜빵도 갔다 왔어 개년아.”

그녀의 손가락이 그의 말을 따라 움직였고, 그는 그녀에게 다가오더니 그녀의 위에 올라타고선 뺨을 때려댔다. 그에게선 술냄새가 났다. 그녀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고, 그저 바닥에 머리를 대고 천장을 바라봤다. 씨발년, 씨발년, 타이핑을 해댔다. 천장에선 물고기들이 헤엄치고 있었다. 물고기들은 수민을 응원하고 있었다. 그녀는 미소를 지었다.

“용서는 내가 아니라 내 남편한테 구해야지. 근데 남편이 죽었잖아. 그러니 용서도 없는 거지.”

수민이 말했고, 형욱은 때리는 걸 멈췄다.

“뭐?”

“술 마셨지? 그때처럼 죽일 거야?”

“이 잡년이!”

수민은 팔을 뻗어 어항을 두 손으로 잡아 형욱의 머리를 후려갈겼다. 어항이 깨졌다. 깨진 유리조각들 사이로 상희가 팔딱거렸고, 형욱은 피를 흘리며 바닥에 쓰러졌다. 수민은 천천히 일어나 어항을 하나씩 들어 그의 머리 위에 내리쳤다. 바닥에 피와 물이 섞여 흘렀다. 그녀의 손에서도 피가 흘러내렸다. 형욱은 이제 어항을 내리칠 때마다 움찔거리기만 할 뿐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다. 마침내 어항을 다 깬 뒤, 수민은 형욱의 주위를 한 바퀴 돌았다. 자각, 자각, 팔딱, 팔딱, 발걸음을 뗄 때마다 유리 깨지는 소리와 금붕어들의 팔딱대는 소리가 났다. 그녀는 금붕어들을 집어 커다란 어항에 집어넣었다. 몇몇은 죽어있었고, 몇몇은 죽어가고 있었다. 그녀는 살면서 처음으로 해방감을 느꼈다. 온몸에 피가 범벅이었다. 그녀는 크게 웃어제꼈다.

이틀 뒤, 그녀는 좀 더 큰 어항을 하나 더 사기 위해 집을 나섰다.

그녀는 이제 말을 더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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