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시에 일어난다. 일어나서 세수를 하고, 운동을 하고, 밥을 먹고, 도서관에 갔다가, 하루종일 공부를 하고, 아, 중간에 도서관 구내식당에서 밥도 먹고(거기 돈까스가 참 맛있다), 밥 먹으면 이도 닦아야지, 다시 공부하고, 집에 돌아와서 유튜브 좀 보다가, 그러다 자고, 다시 6시에 일어난다.
이것은 그, 혹은 그녀가 잠들기 직전에 세운 나름의 계획이었다. 이것이 그녀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그는 몰랐다. 아마 그녀 자신도 몰랐을지 모른다. 어찌 됐든 간에, 그녀는 다음날 아침을 위하여 일찍 잠을 청했다. 몇 번 뒤척이더니 머리맡에 놓인 휴대전화를 들어 알람을 맞추고, 다시 끄고, 아 맞다, 화장실 불 안 껐다, 다시 일어나서 갔다가, 간 김에 볼일도 보고, 일어난 김에 물도 좀 마시고, 다시 돌아오니 잠이 다 깨버렸다. 그래도 그녀는 내일을 위하여 눈을 감았다. 아니, 근데 그 남자는 참 이상했단 말이지. 그 남자가 다가왔을 때, 그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그냥 서 있기만 했었다. 누군가 다가오는데 아무것도 못한다는 건 참 이상한 일이었다. 세상이 전부 다 멈췄는데 그 남자만 혼자 다른 세상에 속한 사람인것마냥 외로이 움직이고 있었다. 그것도 그녀에게로! 덕분에 남들이 속한 곳과 같은 세상에 속해있는, 그래서 멈춰버린 그는 그 남자에게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아. 유튜브 볼까, 아니 들을까.
사각사각, 연필소리. 이제부턴 매일 들을 테니, 연필소리 말고 다른 소리를 들어보자.
장작 타는 소리. 그 남자가 웃는다. 그녀에게 다가와 그녀의 귀에다 대고 속삭인다.
“에이….에스….엠….알…..”
그는 눈을 뜨고선 짜증 섞인 채로 유튜브를 꺼버린다. 씨발 별 이상한 꿈이야.
요즈음 그가 하는 공부는 영어였다. 그것도 토익 그딴게 아니라 아주아주 어려운 영어. 그는 캘리포니아로 떠날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유는 딱히 모르지만, 거기서 살면 뭔가 다를 거라는 막연한 기대감이 있었다. 어쨌든 공부를 해야지. 공부를 해서 좋은 영어 성적을 따고, 이것저것 서류 열심히 준비하고, 아 교수님 추천서는 어쩌지, 아는 교수가 한 명도 없다.
그녀는 한숨을 쉬고선 다시 유튜브를 켰다. 아 영어 들으면서 잘까. 아이,엘,오,유,븨,이,와이,오,유. 근데 무슨 영어를 들을까. 헬로 에브리원! 투데이 위 윌 디스커스 어바웃. 아 씨발.
뒤돌아 눕자 갑자기 남자가 그녀의 입술에 입을 갖다 댄다. 그녀는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은 채로 그녀의 입 안에 들어오는 혓바닥의 맛을 음미한다. 너 언제 와있었어. 보고싶었잖아, 진짜로. 까칠한 턱수염, 너 면도 안했지. 남자의 대답하지 않고 웃기만 한다. 그의 손이 그녀의 파자마 속에 들어온다. 그녀는 새삼스레 그 손길이 달콤하다 느낀다.
잠에서 깨어나자 그는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한다. 아침 6시. 날이 밝아온다. 남자의 미소가 어릿하게 그녀의 가슴에 떠오른다. 그녀는 더 이상 남자의 얼굴도 잘 떠오르지 않는다. 그 남자가 누구였더라. 침대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가 세수를 한다. 아무 일도 없었나 싶을 정도로 평온한 아침. 세면대에는 곰팡이가 피어 있었다. 곰팡이 제거제를 사야지, 언제 살까. 도서관에 갔다 집에 돌아오는길에 산책 하는 셈 치고 사러 가야겠다. 마트 가는 김에 장도 좀 볼까. 콩이랑, 계란이랑, 간단하게 삶아 먹을 수 있는 것들. 밥 차리기는 귀찮으니까.
그는 통장의 잔고를 생각한다. 이번 달에는 돈을 좀 더 아껴야 해.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통장에 돈이 많지 않다. 싼 것들로 사야지.
밥을 차린다. 어젯밤에 밥을 지어놔서 그냥 있는 밥을 퍼서 반찬을 꺼내어놓기만 하면 됐다. 반찬도 다 떨어져간다. 그녀는 순간 그를 둘러싼 것들이 하나 둘 떨어져간다는 기분을 받았지만,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순간 죄어오는 가슴을 움켜쥐었다. 이것도 그녀에겐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다.
밥은 늘 그랬듯 맛이 없었다. 밥알을 씹는 일은 왠지 모르게 힘든 일이었다. 콩이나 삶을걸. 콩깍지를 꾹꾹 눌르면 그 안에서 튀어나오며 모습을 드러내는 완연한 초록빛깔 알갱이, 그걸 씹으면 어떤 날은 짭짤하기도 하고, 어떤 날은 달달하기도 하고, 하여튼 그날 기분에 따라 다양한 맛이 나는 녀석들이다. 밥을 먹고는 뭐 하기로 했었지. 일단 이를 닦자. 그 전에 냉장고에 반찬통들을 집어넣어야지. 냉장고 문을 연다. 이것저것 냉장고에 가득 있는데, 먹을 것은 없다. 가공되기 전의 날 것. 그녀는 요리를 하지 않는데 왜 이것들이 냉장고에 있는지 모를 노릇이다. 조금 있으면 썪겠네.
나갈 준비. 이를 닦고, 옷을 입고, 공부할 것들을 챙기고, 또 뭘 챙겨야 하지. 아 그래, 저녁에 장보고 넣어올 수 있게 보조가방 하나 접어서 가방에 넣어야겠다.
그녀는 뭔가를 빠트렸다는 생각을 했다. 아, 운동. 늘 하던 건데, 왜 까먹었지. 그녀는 츄리닝으로 옷을 갈아입는다. 어쩐지 도서관 가기엔 시간이 좀 이르다 했어.
운동가? 응. 조심히 다녀와.
그녀는 그의 입술에 가볍게 자신의 입술을 댄다. 공원의 운동장을 8바퀴 돈다. 그가 매일 아침 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오늘따라 유달리 힘들다. 이런 적 없었는데. 내가 운동을 언제부터 안했었나? 헉헉대는 숨소리가 귀에 들렸다. 그녀는 꿈에서 깨어나고 싶었다.
온 몸이 땀으로 젖었다. 콘돔 가져올래? 응. 얼른. 다리에 쥐가 날 것만 같았다. 그녀는 공원 벤치에 앉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지러웠다. 다시 정면을 바라보았을 때, 남자가 그녀 앞에 서 있었다. 그녀는 또 다시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전화가 울렸다. 엄마다. 그는 어머니의 성난 목소리에 건성으로 대답했다. 이년아. 제발 정신좀 차려라. 언제까지 그렇게 살거니. 세상에 아침 6시에 일어나서 밥먹고 운동하는 멋진 청년한테 한 소리인가. 아 그러고보니 내가 원래 운동하고 밥먹는데 밥먹고 운동했구나. 그래서 몸이 무거웠나?
전화를 끊고 보니 남자는 사라지고 없었다. 갑자기 교통사고라도 당한 것마냥 온 몸의 여기저기가 아팠다. 멍이 들 것 같았다.
그녀는 집에 와 쓰러지듯 누워 잠들었다.
눈을 떠 보니 그가 그녀의 옆에 누워있었다. 창문을 통해 들어온 햇볕이 그들의 이마를 달구고 있었다. 그녀는 눈을 감고 그의 입술을 생각했다. 입술이 어떻게 이렇게 두꺼워 너는? 내가? 응. 나 별로 안두꺼운데? 아니야, 나랑 비교해봐. 그런가? 아무도 너한테 그런 얘기 안해줬어? 누가 나한테 입술 두껍단 얘기를 해주겠어. 그것도 그렇네.
따듯해.
배가 고팠다. 베갯잇이 젖어있었다. 침을 흘리고 잤나. 베개 커버도 한번 빨 때가 되긴 했지. 어휴 더러워라.
시간을 본다. 12시 30분. 돈까스 먹어야지. 구내식당 몇시까지 하더라. 서둘러 가면 늦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는 샤워를 했다. 샤워를 하고 옷을 입자 기분이 좋아졌다. 대신 가방은 조금 무거웠다. 몸이 좀 안좋아서 그런 것 같았다. 얼른 돈까스 먹어야지. 먹기 좋은 크기로 잘라서, 조금 눅눅해지더라도 그게 편하니까. 아- 하고 떠먹여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 두꺼운 입술 오물오물하는 모습이 참 귀여운데.
그녀는 집 밖에 나왔다. 도서관에 가야 하는데 길이 생각나질 않았다.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배경화면엔 웃는 남자가 서있다. 그녀는 그의 두꺼운 입술을 보고도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 시립도서관. 길찾기. 그녀는 파란 화살표를 따라 걸어갔다. 지도 위에 찍힌 빨간 점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오늘 해야 할 공부가 많다. 서류 제출 전까지 영어 점수를 따려면 지금보다 더 열심히 살아야 한다. 그는 시간을 보고, 아무래도 오늘은 밤 늦게까지 공부를 해야겠다고 다짐한다. 그러면 곰팡이제거제는 어쩌지.
빨간 점은 파란 줄을 잘도 따라갔다. 그는 뿌듯함을 느꼈다. 얼른 가서 돈까스 먹어야지. 어느덧 커다란 사거리에 다다랐다. 그녀는 갑자기 어지러움을 느꼈다. 토하고 싶었다. 오늘 정말 컨디션이 엉망이네.
뭐해?, 남자가 그녀의 귀에 속삭였다.
어, 응, 몸이 좀 안좋네.
진짜? 어쩌지? 병원 가볼까?
괜찮아. 나는 왜 그런지 알고 있어.
파란불이 들어오고, 그녀는 냉큼 횡단보도 위로 뛰어갔다. 울렁울렁. 그녀는 온 몸에, 눈 밑까지 물이 가득 찬 느낌을 받았다. 그녀가 한걸음 내딛을 때마다 물이 그녀의 눈으로 넘쳐 흘렀다. 그는 해야 할 영어공부에 대해 생각했다. 아 정말, 왜이래 진짜.
여기 돈까스, 그 있잖아, 싸구려 돈까스, 분식집 가면 파는거, 그 맛이 나. 맞아, 막 고급진 맛은 아닌데 가끔 이런게 먹고싶지. 나는 근데 이런 맛이 비싼 돈까스보다 더 좋다?
어디야?
나 도서관 가고 있어. 지금 건너는 중! 사거리!
그녀는 길을 쳐다보는 대신 지도 위의 파란 줄과 빨간 점을 바라보았다. 아직까진 잘 가고 있었다. 그래. 이번에야말로. 빨간 점이 사거리 한 가운데에 찍혀있었다. 눈물 때문에 흐릿하게 번져 보였다. 핏자욱이 가득한 사거리와 꽉 잡은 남자의 손을 떠올렸다.
자동차 한 대가 그의 앞에 멈춰섰다. 남자는 깜짝 놀라 뒷걸음질치고,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도 성공이다.
그녀는 들뜬 기분을 안고 도서관을 향해 걸어갔다. 그는 아직 그녀 곁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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