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 있습니다!!!
몇 달 전, 넷플릭스 드라마 [퀸스 갬빗]이 꽤 많은 인기를 끌었다. 인기를 끈 이유는 물론 다양하겠지만, 기본적으로 나는 그 서사가 [사이코지만 괜찮아] 류의 서사와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사이코지만 괜찮아]는 주인공 남녀 간의 관계에 포커스가 맞춰져 있고, 서사에서 제공하는 박진감 또한 상당 부분 그 둘 사이 관계에 걸린 강한 장력에서 기인한다. 그러나 결국에는 [퀸스 갬빗]과 [사이코지만 괜찮아] 모두 인간 본연의 외로움을 이겨내는 방식을 조망한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외로움이라는 감정은 타인의 개입과 동시에 소멸되는 감정이기에 가장 개인적인 것이고, 그러므로 가장 보편적이고 해결하기 어려움 부정적인 감정이기도 하다. 둘 모두 (다소 거칠게 설명하자면) ‘나에게 대체 왜 이렇게 잘해줘?’라는 서사로 그 감정을 해소하는 데에 성공했다.
[퀸스 갬빗]이 특별한 이유는, 극 중 배경을 관통하는 시대적, 문화적 배경을 성공적으로 재현해내는 데에 성공했다는 것이다. 드라마에선 여성에 대한 당대 사람들의 인식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냉전 시대의 정치적인 문제들이 드문드문, 때로는 직접적으로 반영된다. 이 모든 문제들이 당돌한 여성인 ‘베스 하먼’을 관통하고, ‘체스’를 매개로 주인공의 직접적인 개입 없이 뭔가 어렴풋이 해결된다.
드라마는 외로움에 시달리던 베스 하먼이 어찌어찌 이를 극복해 내고, 마지막 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길거리에서 체스를 두고 있던 러시아 (남자) 노인에게 ‘Sygrayem(두시죠)’라는 대사를 던지면서 끝나는데, 이건 문화적으로는 여성의 능력에 대한 당대의 사회적 편견이 다소 불식되었음을, 정치적으로는 냉전시대의 종식을, 베스 개인에게는 타인과의 유대를 쌓는 법의 터득을 상징한다. 베스는 당대의 문화와 정치에 관심을 두고 있지 않고, 오로지 자신 앞에 놓인 체스판의 무게와 ‘자신의 통제 하에 있는 64칸짜리 세상’ 밖 외로움을 견뎌내는 데에 모든 에너지를 쏟는다. 그러나 드라마를 감상하는 사람들은 전지적으로 모든 것을 해석할 수 있으므로, 해당 서사가 당대의 젠더 문제, 정치 문제를 꽤나 직접적으로, 그러나 ‘넌지시’ 묘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이코지만 괜찮아]의 문영이 동화를 매개로 자신을 드러내고, 그걸 알아봐 주는 타인을 통해 외로움을 극복해내듯, [퀸스 갬빗]의 베스는 체스를 매개로 체스판 너머에 앉아있는 사람과 그 체스판을 바라보는 수많은 사람들과 유대하고 소통하는 방법을 배운다. 이런 중심 서사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단순히 체스 불모지의 ‘여자’ 신동이 러시아 ‘남자’ 체스 마스터를 꺾는 ‘다윗과 골리앗’ 류의 이야기로 [퀸스 갬빗]을 바라보면, 이 드라마는 그냥 흔한 ‘계란으로 바위 치기’ 서사와 다를 바 없어진다. 드라마를 매력적으로 만드는 것은, 위에서 언급한 문화적, 정치적 배경들이 감칠맛을 내는 조미료로써 등장한다는 것이다. 혹자는 (자신의 무지함을 과시하고 싶은 지 모르겠지만) ‘여자들은 예쁜 여자가 예쁘게 차려입고 나와 남자들을 다 이겨먹는 스토리를 좋아한다’라는 요상한 결론까지 내리곤 했는데, 이런 평가를 내린 사람에 대해서는 서사에 가미된 (페미니즘이라고 할 수도 없는) 페미니즘적 요소를 아무리 감안하고 대한민국 중년 남성의 무지함을 또 한 번 참작하더라도, ‘문화에 대한 이해가 0에 수렴하는구나’라는 결론밖에 못 내리겠다.
문화적인, 정치적인 문제들을 ‘넌지시’ 짚는 드라마는 최근 넷플릭스에서 새로 개봉한 ‘뤼팽’이라는 드라마를 들 수 있겠다. 프랑스를 배경으로 한 이 드라마는 프랑스의 인종 차별 문제를 보여주는데, 이는 흑인인 주인공 아산 디오프의 아버지가 차 안에 있는 백인 여성에게 말을 건네자 그 여성이 겁을 먹으며 차 문을 잠그는 모습이나, 그를 이유 없이 도둑으로 몰아가는 장면 등에서 드러난다. 사실 서사의 뼈대는 한국에서도 흔한 ‘정치권과 결탁한 재벌 엿먹이기’ 드라마인데, 대부분이 ‘황인’인 우리나라에선 일상에서 접하기 힘든 ‘인종차별’이라는 문화적 요소가 재료로 들어갔다는 것이 흥미롭다. 아버지-아들로 연결되는 서사에서, 아들은 당연히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애쓰는데, 아버지 세대 때는 단순히 ‘약점’에 불과한 인종적인 특성이 아들 세대에 와서는 자신을 보호하는 무기로써 활용된다는 점이 새롭다. 예를 들어 시청에 들어가 경감을 납치하는 장면에서, 변장한 디오프가 IT 담당자 행세를 하다가 자신의 신분이 의심받는 순간에 ‘지금 내가 흑인이라고 인종차별 하는거냐’라는 식으로 ‘가불기’를 시전 하며 상황을 모면하는 장면이 그렇다. 세대가 바뀌면서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인종 문제는 많이 사라졌지만, 보다 미세하게 일상 속으로 스며든 인종 차별 문제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면서도, 동시에 그걸 재치 있게 활용하는 ‘유색인종’의 모습이다. 디오프의 유년기 시절부터 성인이 되기까지의 문화적인 변화는, 그 스스로가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그를 관통하고, 서사는 놀랍게도 이를 전지적으로 짚어낸다.
시대가 변하면서 ‘현실을 있는 그대로’ 담아내는 문제들이 꽤나 큰 난관에 처하고 있는데, 이는 단순히 현실을 얼마나 재현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맥락에서 정확히 짚어내느냐’의 문제와 연관이 깊다. 인종차별, 젠더, 빈부격차 등의 문제들을 직접적으로 겨냥하는 서사는 사실 쉽다. 성공적인 케이스는 [82년생 김지영], [더 헬프], [증오(La Haine)] 등이 있고, 오히려 너무 쉬운 나머지 ‘히든 피겨스’ 류의 ‘백인 비위맞추기’ 스토리가 나오기 십상이다. 어려운 것은 중심 서사는 따로 있는데 거기에 수많은 문화적인 요소들과 맥락들을 덧붙여서 다양한 ‘차별’을 답습하지 않으면서도 입체감 있는 현장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한국 드라마에는 남초 커뮤니티에서 PC주의 드라마라고 욕을 오지게 먹었던 ‘보건교사 안은영’ 말고는 본 적이 없는 것 같고, 외국 드라마에서는 위에서 언급한 퀸스 갬빗, 뤼팽 등을 예로 들 수 있을 것 같다. 이런 작품들의 등장은 ‘작품성이 좋냐’와는 별개로 현실의 문제들을 가감 없이 드러내면서도 중심 서사를 굳건하게, 꾸준히 이끌어가는 능력이 필요한 때가 되었음을 시사하지 않나 싶다. 놀랍게도 시대가 발전하긴 발전했는지, 현실을 드러내기 위해 단순히 흑인 배우를 더 많이 쓰고, 여자 주인공을 더 많이 내세우는 데에서 그치지 않는다.
문화적인 맥락을 대놓고 떠먹여주던 ‘82년생 김지영’을 넘어서, 비로소 개개인을 관통하는 문화를 짚어내는 작품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비평'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곰문곰문: 모달리티의 중첩 (1) | 2024.03.18 |
---|---|
자본과 인간성의 등가교환 : 영화 <정이> 리뷰 (1) | 2023.02.06 |
[소설] 렛미인: 소극적 반달리즘 (0) | 2019.06.09 |
[소설] 영원한 이방인(Native Speaker) : 언어의 냉소 (0) | 2019.04.29 |
예술 비평은 객관적일 수 있는가? (0) | 2019.04.26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