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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자본과 인간성의 등가교환 : 영화 <정이> 리뷰

by 고우 2023. 2.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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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정이>가 공개된 지 좀 지났다.

반응은 크게 두 가지로 양분되는듯하다.

하나는 “쥰내 재미없다!!!!!”, 다른 하나는 “그럭저럭 볼만하던데?”

물론 그 외에 영화에 대한 평가와는 별개로 “한국에서도,,, 이제는,,, 이런 영화가 나와줘야지,,,”하는 거시적인(?) 시각의 사람들도 있긴 하다.

나는 “그럭저럭 볼만하던데?”라고 생각했던 사람이라, 어떤 점을 흥미있게 봤는지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어쩌면 “쥰내 재미없다!!!”하면서 봤을 당신도 “이렇게 보면 그래도 흥미로운 지점들을 찾을 수 있구나" 정도의 생각을 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

 

이야기는 도식이다

본격적인 논의에 앞서, ‘도식’에 관해 이야기해볼 필요가 있겠다.

이야기는 하나의 도식이다. 도식이라 함은 현실 세계의 어떤 측면을 인식하는데 도움을 주는 사고의 틀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예컨대 MBTI는 하나의 도식이다. 어떻게 모든 인간군상이 16가지 범주로 구분될 수 있겠냐마는, “어!! 진짜 이런데!!”하는 지점들이 분명히 있고, 다양한 성격의 사람들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을 준다. ‘저 새끼 왜 저래?’가 아니라, ‘쟤는 ENTP라서 저렇구나~’ 하고 납득하게 되는 것이다.

당연히 인간의 언어와 사고는 현실 세계를 단칼에 베어내서 모든 상황을 분석해 낼 수 있을 만큼 풍부하지 않기 때문에, 무언가를 도식화한다는 것은 당연히 그 대상의 특정 측면을 납작하게 뭉게 버린다는 것과 동일하다. 그러나 잘 만든 도식은 설득력을 갖고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를 보다 직관적이고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게끔 도와준다. 예컨대 경제학에선 (보통의 경우) 합리적으로 이윤을 추구하는 자유로운 객체들이 시장에서 거래를 하는 가상의 공간을 상정함으로써 경제 시스템 내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현상들을 설명한다. 여성학은 남성과 여성으로 대표되는 ‘젠더’라는 도식을 활용해 문화와 사회의 다양한 현상들을 설명한다. 당연히 모든 상황에 들어맞는 단 하나의 이론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고, 때와 장소에 따라 적절한 도식을 선택하고 적당히 변형해 현상의 원리를 설명할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하다.

이야기 또한 세상의 다양한 측면을 도식화해 제시한다. 우리 사회의 구조, 인물의 성격, 인물 간의 관계, 사건의 전개 등등 모든 것들이 크고 작은 도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작품의 구조를 살펴보면 한 작가의 세계관도 함께 엿볼 수 있다.

이 인물은 왜 이렇게 소심하고 줏대가 없는데 때에 따라 급발진을 하는가? 만약 그 인물이 어린 시절 아버지로부터 인정받지 못하고 자라왔다는 설명이 추가된다면, 이는 ‘한 사람의 성격은 어린 시절의 경험에 의해 크게 좌우된다.’ , ’부모로부터의 인정은 한 개인의 독립심에 큰 영향을 미친다’ 등 일종의 심리학적 도식이 활용된 셈이다.

일본이 까무러지고 미국이 벌벌 떨고 깐느가 무릎꿇은 K-영화의 자부심 ‘기생충’은 어떤 도식이 두드러지는가? 말할 것도 없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재산에 따라 형성된 계급, 그로부터 비롯한 생활상의 차이, 성격의 차이가 이야기의 핵심적인 도식이라고 할 수 있다.

SF의 흔한 도식

그렇다면 이쯤에서 암울한 근미래를 그리는 많은 SF에선 어떤 ‘도식’이 자주 등장하는지 살펴보면 좋을 것 같다.

첫 번째는 ‘신체의 자본화’이다. 나온지 좀 된 ‘사이버펑크: 엣지러너’가 대표적인 예시가 될 것이다. 주인공을 비롯한 수많은 인물들은 자신의 신체 능력을 업그레이드하기 위해 많은 돈을 투자한다. 그들이 살아가는 세계에서 신체 능력은 곧 생존과도 직결되는 문제이고, 신분 상승을 꿈꿀 수 있게 하는 수단이 된다. 이제는 고전명작의 반열에 올라선 ‘공각기동대’ 시리즈의 모토코 또한 뇌 일부를 제외한 신체의 모든 부위가 기계로 구성되어 있다. 그녀가 의체를 선택한 것은 분명 자의가 아니었으나, 나중엔 신체 능력 향상을 위해 수많은 불법 개조를 했음을 암시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신체의 자본화’는 거대해진 미래 사회의 모습과도 다소간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세계는 수많은 네트워크로 연결되고, 집단과 시스템은 점점 고도화되면서 한 개인이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을 아득히 넘어서게 된다. (이는 현재 시점의 현실에서도 어느 정도 사실인 것처럼 보이는데) 이해할 수 없는 세계 앞에 인간이 유일하게 느낄 수 있는 감정은 아무래도 무력감일 것이다. 신체는 누가 뭐래도 확실한 ‘개인의 소유물’이고, 가장 확실한 투자 대상이 된다. 행위와 그 결과가 정확히 예측되고, 특히 기계 장비를 통한 ‘업그레이드’가 가능한 세계관에서라면 헬스장에서 열심히 쇠질 하는 것보다도 확실한 성과를 보장받을 수 있다.

두 번째는 ‘자본주의의 극대화’이다. 많은 SF에서 자본주의는 극대화된 상태로 표현된다. 자본주의는 사회 전체에 팽배해져서 삶의 중요한 가치들을 실현하기 위한 ‘매개체’로 자리매김하게 되는데, 예컨대 돈이 없어 사랑하는 이를 잃게 된다거나 하는 장면이 자주 등장하곤 한다. 오늘의 영화인 ‘정이’에서도 돈이 없는 사람들이 자신의 ‘뇌’를 오픈소스화(?) 해버리는 설정이 등장한다.

정이에서 엿볼 수 있듯이, 신체의 자본화와 자본주의의 극대화는 충분히 함께 표현할 수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을 가만히 생각해 보면, 자신의 신체를 활용한 노동은 대개 가난한 이들이 하는 경우가 많다. 자본주의가 보다 극대화된 미래사회를 배경으로 한다면 하층 계급에 속한 이들이 자신의 신체에 대한 ‘투자’를 지속적으로 행하는 이유가 나름대로 설명이 된다. 자신의 신체 말고는 돈 벌 수단이 없게 되는 것이다.

SF의 흔한 주제

한편, SF에서 자주 등장하는 주제가 또 있다. 바로 인간성이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인간성’이라고 표현되었지만, 여기엔 우리가 ‘인간’을 구성하는 다양한 요소들과 이것들을 둘러싼 철학적 주제들이 모두 포함된 것이라고 생각해도 좋을 것 같다. 예컨대 ‘자유의지’라던가, ‘사고’라던가 하는 것들은 인간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로 인식된다. 또한 다른 인간을 고통에 빠트리거나 죽이는 행위는 윤리적으로 부적절한 것으로 생각된다.

‘블레이드러너:2049’에선 생식 능력이 꽤나 큰 의미로 표현되고, 이 외에 자유의지라던가 하는 철학적인 질문들이 작품 전반에 깔려있다. 공각기동대 영화판에서도 몸 대부분이 기계로 구성된 모토코가 자신의 ‘정체성’에 의구심을 품고, 이는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질문이 된다.

‘아이로봇’ 등 인공지능을 소재로 한 SF들도 인간성에 대한 다양한 고찰을 보여준다. 인간과 동일한 수준의 사고 능력을 갖게 된 로봇을 우리는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만약 그들이 인간과 똑같이 감정을 느끼고 생각하게 된다면 인간과 로봇을 구분하는 것은 무엇이 될 것인가?

인간성이 무엇인가, 어떤 존재를 윤리적 고려의 대상으로 삼아야 하는가 등등의 질문은 과거부터 지금까지 인류를 끊임없이 괴롭혀왔던 질문이다. 그러나 인류는 이 문제에 대해 제대로 된 결론을 내린 적이 없는데, 이는 다소간 답변을 유예해 온 것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육식에 대한 논쟁을 생각해보자. 인간이 육식을 하는 것은 윤리적으로 정당한가? 만약 정당하지 않다면 왜 그렇고, 정당하다면 왜 그런가? 어느 수준의 육식까지 ‘윤리적’이라고 봐줄 수 있을까? 우리는 그런 고민을 외주화 해서 외면하는 데 성공해 왔다. 사회가 분업화되면서 우리는 더 이상 맛있는 고기를 먹기 위해 죽어가는 소의 울음소리와 고통에 잠긴 눈동자를 바라볼 필요가 없어졌다. 손에 피를 묻히는 일이야 그런 일로 돈을 버는 이들이 대신해주면 된다. 덕분에 우리는 소를 먹는 과정의 윤리적 정당성에 대해 논할 시간에 고기의 마블링이 어떻고, 소고기는 어떻게 구워야 맛이 좋고, 어떤 술에 곁들여 먹을 때 풍미가 가장 좋은지에 대해 논할 수 있게 됐다.

SF는 장르적 특성상 기술이 고도로 발달된 사회를 그리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인류가 그간 외면해 온 질문들을 눈 앞에 끌어다 놓기 좋다. 특정한 질문을 극대화한 채로 묘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과 동물을 구분 짓는 본질적인 차이는 무엇인가? 길게 길게 돌려 얘기하느니 인간과 동일한 사고능력을 가진 로봇을 눈앞에 가져다 놓으면 그만이다.

<정이> 또한 인간성에 관한 낡은, 그러나 제대로 답변된 적이 없는 질문을 던진다. 그걸 보고 혹자는 ‘너무나도 클리셰적인 주제’라고 혹평을 내렸지만, 클리셰적인 질문을 던진다고 해서, 또 자신이 관심 없는 주제를 다룬다고 해서 작품 전체의 가치가 떨어진다고 평하는 것은 조금 가혹한 것 같다. <정이>의 흥미로웠던 점은 인류가 어떤 답변을 내렸는지를 다루기보다는 이 어려운 문제를 또 어떻게 회피하는 데 성공했는지를 다룬다는 점이었다.

모든 질문에 답해야 할 의무는 없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질문을 마주한다. 저녁은 어떤 메뉴를 골라야하는지에 관한 사소한 질문부터, 진로는 무엇을 골라야 하고, 어떤 식으로 살아야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한 인생 전반에 관한 질문, 더 나아가 우리 사회와 세상은 어떤 구조를 갖고 있는지에 관한 다소간 거시적이고 철학적인 질문까지, 수많은 문제들이 우리 눈앞에 펼쳐진다.

그러나 우리는 떠오르는 모든 질문에 명확한 답을 찾지 않는다. 그럴 의무도 없을뿐더러, 애초에 불가능하다. 답할 수 없는 질문을 고민할 시간에 우리는 그 질문들을 제쳐두고 눈 앞의 삶을 해치우는 데에 집중해 왔다.

<정이>의 인류사회도 중요한 질문을 마주한 상황이다. 인간의 뇌를 복제하는 기술이 등장해, 특정인과 완전히 동일한 새로운 인격체를 만드는 기술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뇌를 복제해 데이터화하고, 이걸로 로봇을 만들면 이것은 인간과 같은 취급을 받아야 하는가?

<정이>의 인류사회는 특정 인격의 편재성에 따라 윤리적 지휘를 부여하기로 한 듯하다.

복제된 인격은 A, B, C 타입으로 분류되는데, A타입의 경우엔 의체 하나에 그대로 뇌 데이터를 복제하게 되어 인간과 동일한 취급을 받게 되지만, B타입을 선택하면 정부기관에 뇌 데이터를 제공해야 하고 거주·이전의 자유 등 몇 가지 기본권이 제한된다. 마지막으로 C타입을 선택하면 민간 기업들에게까지 데이터를 제공해 인간으로서의 대우를 전혀 받지 못하게 된다.

그러나 생각해 보자. 나와 동일한 성격과 사고 능력을 가진 내 분신이 태어난다면 굳이 그 존재가 나보다 못한 대우를 받아야 할 이유가 있겠는가? 정신의 매질중립성을 인정한다면, 내 뇌를 복제해 태어난 또 다른 나는 어떤 면에선 나보다도 우월한 존재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여기에서 ‘튜닝’의 개념이 들어온다. 영화 중간중간엔 뇌 복제 데이터의 여러 부분을 조작해 고통을 느끼지 못하게 한다거나, 특정 감정을 제거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이는 복제된 인격체의 자유의지를 의도적으로 훼손하는 행위인데, 이를 통해 보통의 인간들은 ‘양산된 인격’이 보통의 인간보다 열등하다는 점을 확인한다.

사실 현시점에도 사람의 뇌에 특정한 자극을 주입함으로써 그 사람의 행동을 일정 부분 통제할 수 있는 기술이 있기는 하다. 또한 다양한 정신과 의약품들은 그 원천이 전기적 자극이 아닐 뿐이지, 인간 정신의 특정 요소를 ‘조작’한다는 점에선 동일하다. 그러나 현 시점에 이러한 기술들의 존재가 인간의 윤리적 지위를 위협하지는 않는다.

결국 인류는 인격체의 편재성을 윤리적 지위를 부여하는 주요한 준거로 삼는 동시에, 편재성을 갖는 인격에 대한 조작 행위를 통해 그들의 윤리적 지위를 끊임없이 확인하고 있는 셈이다. 다시 말해 인류는 ‘나와 동일한 또 다른 인격’의 존재를 받아들이고 그들의 윤리적 지위를 깊이 있게 성찰하기보다는 자유의지에 대한 의도적인 훼손을 통해 인간성에 대한 답변을 의도적으로 유예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기는데, 과연 인격체의 계급화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무엇이냐는 것이다.

여기에서 SF에서 흔히 동원되는 도식이 개입한다. 하나는 ‘신체의 자본화’, 또 하나는 ‘자본주의의 극대화’이다.

앞서 나는 자본주의의 극대화와 신체의 자본화는 충분히 결부될 수 있다는 점을 밝혔다.

A, B, C 타입은 인간의 재산이 얼마나 많은지에 따라 결정된다. 주인공의 어머니 ‘정이’ 또한 주인공의 수술비를 마련하기 위해 C타입 뇌 복제를 당하게 되는데, 만약 주인공 집안에 충분히 많은 재산이 있었다면 그들은 A타입 또는 B타입을 선택했을 것이다.

자본주의가 극대화된 사회에서 돈을 벌기 위해 자신의 신체를 자본으로 활용하는 모습은 ‘사이버펑크:엣지러너’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사이버펑크의 주인공 또한 신체에 너무 많은 기계장치를 부착해 인간성을 잃게 되는 ‘사이버사이코’가 될 위험을 감수하고 지속적으로 자신의 신체를 업그레이드한다.

<정이>는 신체의 자본화를 넘어 ‘인격의 자본화’를 보여준다. 돈을 벌기 위해 자신의 신체를 자본 삼아 용병의 길을 선택한 ‘정이’가, 죽음의 순간엔 자신의 인간성을 자본화함으로써 자본주의의 영원한 노예로 변모하는 모습은, 자본이 가치 실현의 유일한 경로가 되어버린 미래 사회에서 가난한 개인이 어떻게 사회 시스템에 희생당하는지를 보여준다.

<정이>의 매력은 인류가 그간 던져온 윤리적·철학적 문제에 대한 정답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을 현대 사회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자본주의와 결부되었을 때 어떤 ‘결과’가 발생하는지를 제시한다는 점에 있다. 인류는 여전히 답변을 회피하고, 자본주의는 그 수단이 된다.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나에겐 <정이>가 그리는 미래 사회가 꽤나 설득력 있게 다가왔다.

결론은…

아쉬웠던 점은 아마 이 영화에 대한 안 좋은 평가들 대부분일 것이다. 어디서 본듯한 이미지, 어디서 본 듯한 표현방식, 세계관을 설명하고 주제의식을 제시하는 방식들이 다소 유치했던 것은 사실이다. 전투신도 어딘가 모르게 어색하기도 했고…

특히 설정상의 디테일이 여러 측면에서 부족했는데, 뇌를 복제할 정도의 기술을 가지고, 특정 영역을 컨트롤할 정도의 지식을 가진 인류가 뇌의 어느 부분이 고통을 담당하는지, 전투의지는 어느 부분에 존재하는지를 공들여 파악하는 모습은 조금 많이 이상해 보였다. (뇌 지도도 옛날에 뇌과학 수업 들었을 때 배웠던 거랑 차이가 많이 나서 아쉬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이>가 인간성이라는 주제를 자본주의와 결부 지어 표현하는 방식은 그 나름의 독창성을 분명히 갖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인간성’이라는 질문에 명확한 대답을 내리기보다는, 그 질문에 인류가 대처하는 방식을 결과론적으로 제시했다는 점은 높이 살만 하지 않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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