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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예술 비평은 객관적일 수 있는가?

by 고우 2019. 4.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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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의 목적은 예술 작품에 대한 평가가 객관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음을 규명하는 것이다. 이를 위하여 나는 다소 직관적인 문제 상황을 가정하는 것으로부터 논의를 시작해 보고자 한다.

 

1. 선택 문제

 

 

 위 사진에 나온 작품의 제목은 “버릴 수 있는 것들에 대하여 (About things you can throw away)”이다. 왼쪽은 설치 직후의 모습이고, 오른쪽은 철거하기 직전의 모습이다. “테크놀러지와 예술: 전시예술공학” 수업의 기말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나흘간 문화관에 설치되어 있던 작품으로, 나를 비롯한 4명의 학생들이 함께 설치한 것이다. 이 작품은 전시가 진행되었던 당시 서울대학교 미술관에서 진행되고 있던 전시회인 “버릴 수 없는 것들에 대하여(About things you can’t throw away)”에 대한 패러디인데, 그 전시가 여러 사람들이 버릴 수 없었던 물건들을 모아 전시했던 것과는 정 반대로, 관람객들이 직접 작품 전시에 개입하여 책상 위의 물건 중 하나를 골라 가져가는 대신 자신의 물건 하나를 놓고 가게 함으로써 버려진 물건들이 책상 위에 쌓이게끔 고안한 작품이다. 사람들이 버리는 물건은 그 사람들이 버리지 못하는 것들만큼이나 삶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누군가의 소유에 있다가 쓰임을 다하고 버려진 것들의 집합은, 그렇기 때문에 다양한 인간상에 대한 생각을 하게끔 한다. 도장에 비유하자면, 서울대 미술관은 ‘양각’의 방식으로 통해 인간이라는 도장을 팠다면, 나의 팀은 ‘음각’의 방식으로 통해 인간상을 표현하려 했던 셈이다.

 미술을 전공하지도 않은 평범한 학부생 네 명이 설치한 작품은 과연 예술적 가치를 지니고 있을까? 물론 나는 이러한 작품을 직접 설치한 ‘작가’의 위치에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전혀 없다’라는 말에는 쉽사리 동의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 평가를 받으면 자존심도 상할 것 같다. 어찌 됐든 관람객들을 작품의 일부로 끌어들여 쓰레기들을 전시하려는 시도 자체에 담긴 의미가 전혀 없지는 않은데다, 참여형 예술의 핵심인 관람객들이 자신의 역할을 꽤나 잘수행했기 때문이다. 그들 중 일부는 정말로 작품의 의미에 대해 깊이 고민해보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훌륭한 작품’이냐는 질문에, 나는 내 작품에 대한 애정에도 불구하고 분명히 아니라고 자신 있게 대답할 것이다. 훌륭한 작품의 반열에 들기에 나의 작품은 어딘가 부족한 데가 없지 않다. 아이디어 자체가 주는 신선함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어떤 방식으로든 대단한 예술적 성취를 이룬 것도 아니고, 물건들이 진열된 방식, 설치된 장소, 그 과정의 기록 방식 등등, 개선되어야 할 것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관람객들이 작품 의도에 따라 작품을 보면서 ‘인간성’에 대한 고민을 했을 여지도 크지 않아 보인다. 이 작품은 조악하기 그지없고, 작품의 의도를 충실히 반영하여 설계되지 못하였으며, 한마디로 ‘그저 그렇다’. 평범한 비전공자 학부생 4명의 작업이라는 면죄부가 있었기에 망정이지, 진짜 미술 전공자가 똑같은 작품을 만들었다면 그는 온갖 비판에 시달렸어야 했을 것이다.

 물론 감상자 중 한 명 쯤은 내 팀의 작품을 보고 엄청난 감명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러한 감상자조차도 작품에 대한 나 자신의 평가에 큰 이의를 제기하지는 못할 것이다. 나의 작품이 아주 훌륭한 작품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조차도 ‘데미안 허스트의 작품과 나의 작품 중 하나를 없애야 한다면 무엇을 없앨 것이냐’는 질문에 고민하지 않을 것이다. 고민할 필요도 없이 그들은 나의 작품을 없앨 것이고, 나 또한 그것이 ‘옳다는’ 것을 안다.

 이처럼 ‘두 작품 중 무엇을 없앨 것이냐’는 질문은, 다소 극단적이긴 하지만 여러 예술작품들의 가치에 대한 우리의 직관적인 판단들을 보여주기에 굉장히 중요하다. 위에서 언급했듯, 나의 작품과 데미안 허스트의 작품 중 하나를 없애는 문제에는 큰 고민이 필요하지 않다. 그 둘의 가치에는 매우 큰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켈란젤로의 ‘피에타’와 ‘천지창조’ 중 하나를 없애는 문제는 어떨까? 이 문제에 대해 쉽사리 답하기는 어려운 것 같다. 둘 다 엄청난 예술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베토벤 9번 교향곡과 방탄소년단의 대표곡 중 하나인 ‘DNA’ 중 하나를 포기하는 문제는, 방탄소년단에 대한 전세계 팬들의 힘이 아무리 강력하다 한들 베토벤 9번 교향곡과 3번 교향곡 중 하나를 포기하는 문제보다 어렵지는 않은 것 같다. 이런 사례들을 우리는 계속해서 생각해낼 수 있다. 똑같은 질문임에도 다루는 대상들이 무엇이냐에 따라 질문의 ‘무게’에 차이가 난다는 것을 우리는 직관적으로 알고 있는 셈이다.

 

2. 예술에 대한 평가가 오로지 주관적인 것인지에 관한 문제

 

 위와 가상의 상황에 대한 질문, 즉 ‘선택 문제’에 대해 느끼는 ‘대답하기 어려운 정도’는 사람마다 비슷할 것이라는 사실은, 예술적 가치의 평가 방식에 대한 하나의 의문, 즉, 예술적 가치가 본질적으로 비교 가능한 성질의 것인지에 대한 의문을 갖게 한다. 예술적 가치가 본질적으로 비교 불가능한 것이라면 어째서 나의 작품과 데미안 허스트의 작품 사이의 선택은 너무나도 손쉬운 것일까? 반대로, 예술적 가치가 본질적으로 비교 가능한 것이라면 어째서 베토벤 교향곡들 중 하나를 포기하는 문제는 이토록 어려운 것일까?

 이에 대한 하나의 답변은, 두 번째 질문에 천착하여, 예술작품에 대한 감상자들의 반응은 어디까지나 주관적일 수밖에 없으므로 여러 작품들에 대한 개개인의 반응들이 엇갈리는 것은 당연한 것인데다가, 다소 보편적으로 보이는 전자의 상황 또한 사회문화적 관습 등의 영향으로 인해 우연히 비슷한 주관을 획득한 것에 불과하다고 설명하는 것일 테다. 이러한 설명은 설득력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어딘가 불만족스러운 것 같다. 우리가 예술을 감상하는 방식은, 단순히 개개인의 미적 취향에 의해서만 좌우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의 예술작품에 대한 태도는 예술작품을 둘러싼 환경, 예술사적 맥락 등에 대한 이해의 정도에 따라 좌우되는 경우가 흔하다. 작곡가 윤이상의 “Tapis pour cordes(현을 위한 융단)”는, 보통의 클래식 음악만 즐겨듣던 이들에게는 상당한 충격으로 다가올 것이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불협화음, 성난 듯한 현악기들의 울부짖음, 그 기저에 흐르는 왠지 모를 부드러운 선율은 분명히 우리가 흔히 아는 클래식 음악들과는 사뭇 다르다. 그의 음악이 쇤베르크의 12음법에 동양의 선율을 결합한 음악적 실험의 결과물이고[1], 그러한 측면에서 생각해보면 엄청난 예술성을 담지하고 있다는 것은, 그의 음악을 둘러싼 예술사적 맥락과 여러 음악 이론들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지 않고서는 쉽사리 이해하기 어렵다. 현대음악을 처음 접한 이라면 그의 음악을 듣고 ‘이것이 무슨 음악이냐’ 라며 화를 낼지도 모르지만, 그런 이라 할지라도 음악에 대한 이해가 풍부한 사람에게 적절한 설명을 들을 기회를 얻는다면 그 음악을 정말 그 자체가 제공하는 쾌(快를)의 목적으로 즐기지는 못하더라도, 해당 작품이 가지고 있는 예술적 가치는 인정하게 될 것이고, 어쩌면 작품에 대한 새로운 지식을 바탕으로 음악을 해석하면서 어떤 인지적 성취감에서 비롯한 즐거움을 느낄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사실 오늘날의 예술작품들에 대한 평가는 그 작품에 대한 일차적인 쾌 혹은 불쾌의 반응을 바탕으로 이루어지기보다는, 그것이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물리적 구조-그것이 시각적인 효과이든, 청각적인 효과이든-에 대한 인식에, 각 구조가 상징하는 의미, 작가가 그 작품을 통해 성취하려고 했던 예술적 목표 등과 연관되어 행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보통의 경우 이러한 작업은 많은 설득력을 가진다. 만약 예술에 대한 평가가 순수하게 주관적인 반응의 결과물이고, 그 보편성 또한 우연의 일치에 불과한 것이라면, 해당 작품에 대한 추가적인 정보가 주어졌다는 이유만으로 작품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쉽사리 변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런 식의 논의는, 우리가 예술 작품을 대할 때 우리의 인식 체계에서 비롯하여 발생하는 일차적인 반응과, 작품 자체에 대한 예술적인 평가는 구분되어서 생각될 필요가 있다는 결론을 이끌어 낸다. 나는 모차르트의 음악보다 베토벤의 음악을 더 즐겨 듣고, 더 좋아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베토벤이 모차르트보다 뛰어난 음악가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두 음악가 모두 함부로 평가하기 어려울 정도로 위대한 음악적 성취들을 이루어냈다는 것은 나의 선호와 관계없이 ‘사실로써’ 존재한다.

 그러나 여전히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남아있다. 과연 작품에 대한 인지적 정ㅂ가 아닌 순수한 미적 반응 또한 주관적이지 않다고 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은 해소되지 않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많은 작품들이 단순히 ‘아름답다’라는 이유만으로 높게 평가받는 것만 같다. ‘모나리자’에 사람들이 열광하는 이유는 그림이 묘사하고 있는 여성의 아름다움, 의중을 파악하기 어려운 우아하고 옅은 미소 등에서 기인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해당 작품을 바라보는 어떤 사람이 여성에게서 어떠한 아름다움도 느끼지 못한다면, 모나리자가 가진 가치는, 적어도 그 사람에게만큼은 그저 예쁜 연예인 사진을 보는 것보다 못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물론 직관적으로 아니라는 생각이 들 것이다. 어떤 이는 그런 특수한 사례들에 기대어서 해당 작품이 가지고 있는 미적 구조를 평가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항변할지도 모른다. 어찌됐든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나리자가 매우 아름답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수가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이 미적인 가치를 담지하고 있는 근거로 제시된다면, 예술작품의 가치는 그저 작품 하나하나에 대한 예술계 또는 사회 구성원들의 투표에 따라 좌우되는 것에 불과할 것이고, 이는 사실상 예술작품의 가치가 어떤 보편적인 이유에 따라 평가될 수 있다는 주장의 한계를 스스로 인정하는 꼴이 되는 셈이다. 그러나 우리의 미적 반응의 기저에 있는 취미 판단의 틀을 구조화할 수 있다는 주장은 설득력을 갖는다.

 작곡을 할 때 굉장히 중요한 것으로 여겨지는 화성학(和聲學) 이론 체계는 어떠한 음들이 어떤 식으로 조화를 이루어야 ‘듣기 좋은’ 소리가 날 수 있는지를 다룬다. ‘도’, ‘미’, ‘솔’ 세 음이 동시에 나면, 우리는 그 소리를 ‘듣기 좋다’라고 생각한다. ‘미’, ‘파’의 두 음이 동시에 나면 우리는 무언가 불편함을 느낀다. 이런 파편적인 반응들의 집합을, 화성학은 음들이 갖는 고유의 진동수 등을 근거로 꽤나 합리적이고 설득력 있게 설명해낸다. 어떤 작곡가가 작곡한 음악이 다른 사람들이 듣기에 굉장히 ‘좋다’라고 여겨지는 경우에, 우리는 그 작곡가가 화성학을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작곡하였다 할지라도 화성학을 근거로 사람들이 느끼는 긍정적인 느낌들을 설명해낼 수 있다.

 이러한 이론 체계가 존재할 수 있다는 가능성은, 이론 체계에서 어긋날 수 있는 다양한 상황들의 존재와 양립 불가능하지 않다. 물은 정상적인 상황에서라면 섭씨 100도에서 끓는다. 그러나 높은 산 위에 있어서 기압이 매우 낮은 상황에서라면 좀 더 낮은 온도에서도 끓는다. 기체의 부피는 일반적인 상황에서 기체의 온도에 비례하여 커지지만, 기압이 온도에 비례하여 조정되는 상황에서는 그렇지 않다. 사실 과학 이론이나 여러 통계 연구 작업들은 그 기저에 있는 어떤 법칙의 존재를 인정하면서도 다른 여러 변수들의 개입으로 인해 발생하는 오차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우리가 ‘객관적’이라고 여기는 학문들에서조차 이런 것들이 인정된다면, 굳이 미학의 영역이라고 해서 예외상황이 보편적인 구조의 정합성을 해친다고 여길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2]

 화성학만큼 고도의 이론 체계를 갖추지는 못했더라도, 우리들이 마주하는 예술작품들의 미적 구조는, 많은 경우 구조화된 근거들을 바탕으로 판단 가능하다. 팬톤 사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팬톤 컬러 시스템’을 기반으로 여러 기업들의 디자인 작업에 필요한 컨설팅을 해 준다.[3] 이들이 시도한 색상에 대한 체계화 작업은 상당히 성공적으로 이루어졌고, 오늘날 팬톤 사는 ‘색’에 관한 지식에 있어서 가장 큰 권위를 갖고 있는 기업으로 평가받는다. 만약 색에 대한 우리의 반응들이 주관적인 것에 불과하다면, 팬톤 사의 시도는 무용(無用)한 해프닝으로 끝났을 것이다.

 이러한 사례들은 우리가 예술작품을 볼 때 일차적으로 느끼는 ‘예쁘다’ 또는 ‘추하다’ 등으로 감정의 기저에 우리들이 보편적으로 공유하고 있는 인식 체계가 존재함을 보여준다. 즉, 우리는 특정한 미적 구조에 대해 쾌의 감정을 느끼게끔 설정되어 있는 존재들인 셈이다. 그리고 이러한 체계의 존재는, 예외적인 개인들의 반응에 의해 쉽사리 부정되기 어렵다.

작품에 대한 평가 - 심지어 순전히 주관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반응들조차도 상당한 보편성을 가지고서 행해지고, 설득력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은 특정한 예술 작품에 대한 평가가 작품이 가지고 있는 특질에 근거하여 객관적으로 행해질 수 있는 일이라는 통찰을 제공하는 것 같다.

 그러나 조금만 더 깊게 생각해보면 여전히 문제는 남아있다. 개별 작품들이 가지고 있는 미적인 구조나 의미들에 대한 평가가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고 한들, 그 작품들 모두를 아우르는 하나의 평가 방식을 만드는 것은 여전히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어째서 우리는 모차르트의 작품이 가진 아름다움을 근거로 그의 높은 예술적 성취를 칭송하는 반면에, 윤이상의 작품에는 같은 잣대로 ‘엉망이다’라는 평가를 내리지 않는 것일까? 혹시 개별적인 판단기준들이 객관적일지라도 여러 가지 판단기준들에 우열을 부여하는 것은 주관적인 작업이 되는 것 아닐까?

 

3. 예술 비평의 방식에 관한 문제

 

 앞의 절에서 제기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하나의 수식을 개념적으로 설정해 보자. 

 

 위의 수식은 예술 작품에 대한 평가가 완벽하게 계량화될 수 있다는 상상을 한다면 만들어질 수 있는 수식이다. y가 작품의 예술적 가치, x가 개별 가치 평가 기준에 따른 가치의 정도라면, a는 각각의 평가 기준에 적용되는 가중치이다. 물론 진짜 이런 식을 만들어서 예술작품에 점수를 매기려는 희망은 헛된 것이다. 예술의 가치가 객관적으로 파악될 수 있는지 여부와는 별개로, 예술적 가치는 상당 부분 질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 식이 예술적 가치에 대한 평가가 어떤 식으로 이루어지는지에 대한 나름의 통찰과 문제의식을 제공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어디까지나 문제에 관한 논의를 위해 도구로써 저 수식을 활용하겠다.

 예술 작품을 평가하는 데에 활용될 수 있는 근거들은 무수히 많을 것이다. 우선, 음악의 예술적 가치를 평가하는 상황을 상상해보자. 대부분의 음악에선 여러 음들의 적절한 조화를 통한 화음 구성, 그리고 그것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면서 드러나는 형식적인 미가 굉장히 중요시된다. 위에서 언급했듯, 이러한 평가들은 화성학 등 여러 작곡 이론들에 기초하여 평가될 수 있다. 이를 바탕으로 ‘합리적인 화음 구성과 형식적 완결성’을 하나의 평가 항목으로 구성하는 상황을 상정하고, 이 기준에 따라 평가된 점수를 x1에 대입한다고 해 보자. 클래식 음악에서라면, 이러한 요소들은 굉장히 중요한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 마땅하다. 한편, 현대음악에 동일한 잣대를 들이미는 것은 어딘가 문제가 있어 보인다. 현대음악에서는 개별 음들의 구성이 화성학의 법칙들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러한 법칙들을 철저히 지키는 것은 작품의 예술성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경우가 있다. 일반적으로 12음법과 같이 기존의 패러다임에서 탈피하려는 시도 자체는 그 자체로 매우 커다란 예술적 가치를 담지하는 것으로 여겨지는데, 스스로를 현대음악의 범주 안에 집어넣으면서도 기존 형식에 대한 반발이나 예술 사조에 대한 자신만의 평가가 배제된 채로 만들어진 곡들은 다른 현대음악 곡들에 비해 그러한 측면에서 부족하다 평가될 가능성이 다분하다. 이러한 관점에서 생각해보면, 클래식 음악에서는 x1 앞에 곱해지는 가중치 a1이 양의 값을 갖는 반면, 현대음악에서는 그 값이 아주 작거나, 또는 음의 값을 가질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모차르트의 곡은 x1이 매우 큰 값을 가질 것이고, 윤이상의 곡은 x1이 매우 작은 값을 가질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당 작품이 속해있는 범주에 따라 a1의 값이 다르기 때문에, 모차르트 곡의 예술성을 평가할 때 x1이 갖는 의미와, 윤이상 곡의 예술성을 평가할 때 x1이 갖는 의미는 달라진다. 마찬가지로, 추상 미술을 평가하는 잣대를 초현실주의에 그대로 적용하는 상황에서도 비슷한 방식의 사고가 요구된다. 위 수식의 특정한 항에 ‘현실을 있는 그대로 재현한 정도’가 들어간다면, 그 앞의 가중치는 추상 미술에서는 음의 값을 가질 것이고, 초현실주의에서는 양의 값을 가질 것이다. 이처럼 평가 대상이 되는 작품이 어떤 것이냐에 따라 평가의 기준이 달라지는 사례들은 수없이 많이 발견할 수 있다.

 위의 식은, 예술적 가치를 구성하는 여러 요소들과 각 요소들의 중요성에 따라 작품이 가지고 있는 예술적 가치를 판단하는 과정을 꽤나 직관적으로 보여준다. 물론 위 수식은 순전히 개념적인 것이기에 실제로 계량화될 수 있는 가능성이 전혀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름의 설득력을 갖지 않나 생각한다. 이러한 모형을 적용하면 위의 선택 문제에서 제기됐던 대작과 졸작 사이의 구분이 용이한 이유도, 대작과 대작 사이의 비교가 불가능에 가까운 이유도 쉽게 설명 가능하다. 즉, 졸작은 각각의 가치를 구성하는 항들의 값이 매우 작기 때문에 그 앞에 곱해지는 가중치가 얼마이든지 간에 최종적인 예술적 가치의 정도는 작기에 대작과 쉽사리 구분하여 평가할 수 있지만, 대작과 대작을 비교하는 작업에서는 각 항들의 개별적인 값들이 매우 크기 때문에, 상대적인 가중치를 설정하는 문제가 매우 미세하고 정교한 작업이 되는 것이다. 또한 완전히 동일한 수준의 예술적 가치를 갖더라도 그것을 구성하는 개별적인 가치들이 완전히 동일한 수준에 동일한 가중치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기에, 둘 중 하나를 쉽사리 선택하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조금만 더 깊게 생각해보면 이 모형은 몇 가지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선, 예술작품의 가치를 구성하는 여러 개별적인 가치들이 무엇인지 확정하는 것이 쉽지 않다. 또한 그런 가치들을 확립한 이후에도, 개별 가치들에 대한 가중치를 작품별로 어떻게 설정해야 할지에 관한 문제가 발생한다. 더욱이, 개별적인 가치들이 서로 무관하지 않고 연관성을 갖는 경우 - 예를 들어 작품의 근본이 되는 발상은 아주 좋았으나 미흡한 표현력으로 그 발상의 가치조차 훼손되는 경우 – 위의 식에는 추가적인 수정이 필요하다.

 현실에서의 비평을 살펴보더라도 이런 문제들은 설득력을 갖는다. 예시로 삼을 수 있는 한 가지 문제는 바로 예술에 대한 도덕적 평가이다. 거트와 같은 학자에겐 예술이 가진 도덕적 흠결은 그 만큼 예술적인 흠결인 것으로 여겨진다. 반면 키이란 같은 학자에겐 상황에 따라 그 도덕적 흠결에 대한 평가가 달리 여겨진다.[4] 예술 작품이 사용하는 소재, 주제의식 등등에 대한 도덕적 평가를 어떻게 내려야 하는지, 그리고 그러한 도덕적 평가는 예술적 가치와 어떠한 관계를 맺는지 등은 여전히 논쟁적인 주제이다. 즉, 위의 식에서 해당 도덕과 관련한 요소 자체를 없애야 하는지, 혹은 항을 만들 필요는 있지만 가중치를 작품에 따라 달리 적용해야 하는지 등에 대해 전혀 확신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 문제를 합의하는 일은 쉽지 않아보인다. 윤리적 가치가 예술적 가치와 어떤 연관을 맺는지에 대한 논의는 굉장히 오래토록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았고, 앞으로도 쉽사리 합의될 것 같지는 않다. 관련된 논쟁은 굉장히 치열하고 또 각 주장들의 설득력이 커서, 이 주제에 관해서만큼은 특정한 답이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개별적인 가치들이 맺는 관계를 규명하는 작업은 훨씬 복잡해 보인다. 무솔리니 정권 시절의 이탈리아를 배경으로 하는 베르나르도 베루톨루치 감독의 “순응자(1970)”는 매우 높은 예술적 가치를 가진 것으로 평가받는다. 영화가 묘사하는 주인공 마르첼로의 불륜행위는 정치적 혼란이 만연하던 사회 속에서 ‘그저 순응하는 자’로 묘사되는 주인공의 감정선과 서사의 배경을 이루는 사상적 담론들에 대한 고찰과 묘한 조화를 이루며 하나의 ‘결과’로써, 그리고 새로운 사건을 촉발하는 ‘과정’으로써 제시된다. 주인공이 행하는 비도덕적 행위는 때문에 작품을 구성하는 여러 철학적 가치들과 반드시 상응하여 해석되어야 하는 것이 마땅하고, 더 나아가 주인공의 불륜 행위가 없었다면 해당 작품은 어딘가 부족했을 것이라는 평가까지도 가능해 보인다. 이처럼 예술적 가치를 구성하는 여러 요소들이 작품 내에서 상호작용하는 경우, 전반적인 예술적 가치는 원래의 것보다 더 커지기도, 때로는 더 작아지기도 할 것이다. 이런 사례들을 일관된 기준에 의거하여 이해하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작업인 것처럼 보인다.

 지금으로써는 위의 모형에서 야기되는 문제들을 완벽하게 해결하는 깔끔한 답을 마련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개별 작품들이 가지고 있는 물리적 구조에 대한 체계적인 분석 및 작품을 둘러싼 사회문화적 맥락, 작품의 의미 구조 등 작품의 가치를 구성하는 개별 요소들에 대해선 보편적인 분석을 해낼 수 있다고 할지라도, 이러한 개별적인 가치들을 조합하고, 최종적인 가중치를 부여하는 것은 결국 비평가 개개인의 주관적 판단에 달린 문제인 것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문제가 완전히 해결 불가능한 성격을 가진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이와 관련한 노엘 캐럴의 논의는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하나의 실마리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큰데, 그는 여러 예술 작품들을 특정한 범주 내로 포섭하고, 그러한 범주를 평가하는 방식에 따라 예술작품에 대한 평가를 객관적으로 행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5]

 이러한 캐럴의 시도는, 말하자면 위에서 제기됐던 가중치를 설정하는 문제를 예술의 범주화를 통하여 극복할 수 있고, 그러한 범주화의 과정 또한 굉장히 합리적이고 객관적으로 행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통해 정당화된다.

 그는 구조적 이유, 역사적 이유, 의도주의적 이유를 근거로 예술 작품들을 범주화하는 것이 객관적인 작업이라는 점을 규명한다. 즉 특정한 작품을 분류하는 문제는 (1) 이미 특정 범주에 속하는 것으로 판단된 기존 예술 작품이 가진 전형적인 특징들을 풍부하게 가지고 있거나(구조적 이유), (2) 작품이 어떤 예술사적 맥락 안에서 출현하였고, 그 속에 그러한 예술 제작 관행이 여전히 널리 존속되고 있거나(역사적 이유), (3) 예술가가 자신의 작품이 어떻게 범주화되기를 의도했는지 간주관적으로 결정할 수 있기에(의도주의적 이유), 단순히 개개인의 주관적인 판단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6] 캐럴의 이러한 주장은 상당히 직관적인 설득력을 갖는다. 윤이상의 음악을 뉴에이지의 일종으로 분류하는 것은 매우 비합리적이다. 그렇게 분류할 근거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최후의 만찬”을 종교화가 아닌 정물화로 분류하여 해석한다면, 그의 작품 해석은 큰 설득력을 갖기 어려울 것이다. 지구상에 셀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모습을 가진 생명체들이 있지만 여러 종을 분류하는 것이 불가능한 작업은 아니듯이, 예술 작품들 또한 각각의 것들이 모두 개별적이지만, 이들을 분류할 수 없을 정도로 개별적인 것은 아니다. 사실상 예술작품의 분류가 순전히 주관적인 작업이라는 주장은, 생명을 분류하는 과학에서의 작업이 주관적이라는 것만큼이나 책임감 없는 주장일지도 모른다.

 물론 캐럴의 주장이 완벽한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의 주장이 우리들이 직관적으로 느끼는 여러 작품들의 예술적 가치 평가가 어떻게 보편성을 가질 수 있는지에 대해 꽤나 큰 통찰을 제공해 준다는 것이다. 앞서 우리는 예술 작품에 대한 평가가 순전히 주관적인 것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잃는 것을 보았다. 따라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개별적인 예외사례들이 천착하여 보편적인 현상을 부정하기보다는, 주관적인 선호 체계에 좌우되지 않을 수 있는 올바른 평가 방식들을 마련하기 위한 논의를 진행하는 것이다. 나는 그 과정에서 캐럴의 논지가 큰 힘을 발휘할 것이라고 믿는다.

 

4. 결론 및 제언 

 

 예술 작품에 대한 평가는 때로 매우 보편적인 것처럼 보이면서도, 특정 문제들에 대해서는 매우 주관적인 선호에 따라 좌우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가 예술적 가치를 판단하는 모습들을 관찰해보면, 그것을 구성하는 여러 가지 요소들이 모두 다 순전히 주관적 반응에 의해 좌우되고, 그것들의 우연한 일치에 의해 보편성을 획득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는 것에는 문제가 있어 보인다. 오히려 작품에 대한 객관적인 이해가 예술 작품에 대해 가지는 우리의 태도를 바꾸는데 도움을 준다는 사실은, 작품에 대한 평가가 객관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는 생각을 갖게끔 한다. 우리는 객관적 판단을 통해 예술작품에 대한 평가와 단순한 선호를 구별해낼 실마리를 얻을 수 있고, 특정 예술작품들을 ‘싫어하면서도’ 동시에 그것이 담지하는 예술적인 가치만큼은 높게 평가하는 다소 이중적으로 보이는 태도를 이해할 수 있다.

 본고에서는 여러 작품들이 가지고 있는 특징들에 대한 분석이 어떻게 객관적일 수 있는지, 더 나아가 그러한 특징들에 대한 분석들을 종합하여 작품이 가지고 있는 예술적 가치를 어떻게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지, 그리고 이러한 과정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은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지를 대략적으로 제시하였다.

 그러나 나의 글만으로는 논의에 부족함이 많다. 특히나 위에 내가 대략적으로 제시한 모형은 순전히 논의를 편하게 진행하기 위한 도구임에도 불구하고 그 자체로 반발을 불러일으킬 것이 뻔해 보인다. 해당 모형을 받아들인다고 할지라도, 몇 개의 항을 설정해야 예술적 가치들을 이루는 개별 요소들을 다 포섭할 수 있는지, 예술적 가치를 구성하는 개별 요소들 또한 개별 예술 작품의 범주에 따라 달라져야 하는 것인지 등은 여전히 논쟁적이다. 사실 이 글에서 전체에서 논쟁적이지 않은 문장은 하나도 없는 것 같다는 회의감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예술적 가치를 평가하는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예술적 가치 자체에 대한 철학적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나의 글은 해당 작업을 체계적으로 행하지 않은 상태에서 논의를 진행하였다. 때문에 논의의 전제를 상당 부분 직관적인 판단들에 의존할 수밖에 없지 않았나 싶다. 향후 이 글에서 논의된 내용들을 보완하여 이를 바탕으로 보다 체계적인 이론 체계를 갖추기 위한 작업들이 필요하다.

 

 

참고자료

 

[1] 한국음악학학회, & 윤이상평화재단. (2006). 윤이상의 창작세계와 동아시아 문화 = Isang Yun's musical world and the East-Asian culture / 한국음악학학회, 윤이상평화재단 공동 엮음. 서울: 예솔.

[2] Carroll, & 이해완. (2015). 비평철학 / 노엘 캐럴 지음 ; 이해완 옮김. 성남: 북코리아.

[3] 팬톤 코리아. http://www.pantone.kr/colorsystems2018/intro.html

[4] 송문영. (2012). 예술 작품의 도덕적 가치와 예술적 가치의 관계 : 비도덕주의를 중심으로 / 송문영.

[5] Carroll, & 이해완. (2015). 비평철학 / 노엘 캐럴 지음 ; 이해완 옮김. 성남: 북코리아.

[6] [5]와 동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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