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래의 『영원한 이방인』은 원제인 “네이티브 스피커(Native Speaker)”가 암시하듯, ‘언어’에 대해 다루는 소설이다. 550쪽이 넘어가는 소설에 대한 평 치고는 지나치게 단순한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사실 이 소설에서 언어라는 것이 함축하는 의미는 굉장히 다층적이고 복합적이다. 그것은 이 작품이 언어를 그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우리의 삶 깊숙한 곳에 실재하는 현상으로 바라보고 서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언어는 의사소통의 수단이자 우리가 우리 주변의 세계를 인식하고 표현하는 도구이다. 이러한 설명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이처럼 사전적인 서술에 불과한 문장으로는 언어를 완전히 표현했다고 할 수 없다. 차라리 언어가 인간의 삶 자체라는 설명, 인간의 삶을 그대로 비추는 거울 같은 것이라는 설명이 더 들어맞을 정도로 언어는 인간성의 많은 측면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영원한 이방인』은 이러한 언어의 특징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도 정작 그러한 특징 자체에는 그렇게까지 큰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이 작품은 언어 외적인 것, 즉 ‘언어의 모습’ 또는 ‘언어가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순간’에 천착한다.
언어학자나 글을 쓰는 작가가 아닌 이상, 보통의 사람들이 일상생활에서 언어 자체에 깊은 관심을 갖는 경우는 많지 않다. 그것의 존재가 우리 인간에게는 너무나 자연스러워 의식적인 노력을 들이지 않는 한 관심의 대상이 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우리가 숨을 쉴 때마다 공기의 존재를 의식하지는 않는 것과 같다. 그렇다면 언어는 언제 주목을 받는가? 그것은 그 언어가 ‘다른 언어’일 때이다. 언어는 그 존재가 다를 때에야 비로소 존재감을 드러낸다. 우리가 자연스레 숨을 쉬다가도 갑자기 이상한 냄새가 나면 깜짝 놀라듯이,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가 우리 귀에 들리면 그제서야 우리는 그 언어에 관심을 갖는 것이다. 우리가 일상생활을 하면서 주의를 기울이는 대상들이 많은 경우 ‘부자연스러운’ 것들이라는 사실을 생각해 보면, 다른 언어에 대한 우리의 반응 또한 여기에서 크게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 그것은 결코 아니다. 무언가에 관심을 갖고 주의를 기울인다는 것은 사실 우리의 사고방식 내에서 ‘없어야 자연스러운 어떤 것’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 과정의 이상도, 이하도 아닌 셈이다. 결국 문제는 어째서 우리가 자연스러운 존재들과 그렇지 않은 존재들을 구분하는지, 부자연스러운 존재들은 어떻게 자연스러운 존재가 될 수 있을지에 대한 논의로 귀결된다.
작품은 수많은 인종이 모여 살아가는 뉴욕 시를 배경으로 한국인과 미국인의 경계에 있는 ‘헨리 파크’를 내세우고 이에 대한 답을 추적해 나간다. 그 여정은 한국에서 미국으로 이민을 간 헨리의 아버지로부터 시작되어, 한국인이자 미국인인 주인공 헨리 파크를 거쳐, 그의 아들인 밋에 이르러 끝나며, 그 여정에 그의 아내 릴리아, 정신과 의사 루잔, 한국 태생의 정치인 존 강이 소용돌이처럼 휘말려 들어온다. 그 이야기는 사실상 백인 주류 사회로 편입하려는 소수민족의 사투와 맥을 같이하고, 그 일차 관문은 언제나 ‘언어’가 된다. 영어를 ‘자신의 언어인 것처럼’ 완벽하게 구사하는 것은 외모가 다른 그들에게 ‘백인과 어울릴 자격이 있다’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유일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헨리의 아버지는 “장사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헨리에게 “영어를 얼마나 잘하는지 보여 주라고, 그것을 과시하라고, ‘셰익스피어 말 몇 마디’를 식은 죽 먹기로 외워보라고” 다그치며(102pg), 헨리 자신은 언제나 “자기가 하는 말에 주의를 기울이”며 말한다(36pg). 언어 교정 수업을 하는 릴리아에게 언어 교정을 받기 위해 찾아오는 아이들 중 많은 아이들 또한 소수민족 아이들이다.
그들이 자신의 언어를 끊임없이 교정하고 지우려 하는 이유는 너무도 단순하게 자신의 민족에 부여된 사회적 정체성에서 탈피하기 위해서이다. 헨리는 “손님들에게 내가 보이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에”(103pg) 한국어 사용을 고집하기도 하는데, 이는 역설적이게도 아시아의 언어를 사용한다는 이유만으로 서구 사회가 아시아인에 부여한 순종적이고 조용한 이미지가 자신에게 그대로 투사된다는 사실을 이미 깨닫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백인 주류 사회에서 소수민족의 언어는 그 안에 담긴 문화의 의미가 어떠하든지, 또 소수민족의 성원 각자의 모습이 얼마나 다양하든지 간에 관계 없이 ‘아시아인’, ‘남미인’, ‘아프리카인’ 등에 부여된 압축적이고 편견 어린 시선을 받게 되는 셈이다. 만약 헨리가 아시아인이 아니라 아프리카인이었다면 아마 그는 눈에 띄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모국어를 사용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모국어를 사용했다간 흑인에게 부여된 반사회적인 이미지가 자신에게 투여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소수민족이 자신의 언어를 완벽한 영어로 바꾸려고 시도한 결과가 언제나 주류 사회에 의해 평가된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그들의 언어는 너무나 쉽게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다. 그리고 그 언어의 존재는 부자연스러운 것이기에, 그들의 존재 또한 ‘다른 존재’로 부각된다. 그러나 그 언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들의 정체성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언어는 언제나 그것이 ‘인식될 때’에만 영향력을 발휘한다. 자신을 판단하는 주체가 언제나 존재하고, 그 주체에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자신에게 강제로 부여된 정체성에서 탈피하거나, 그 정체성을 드러내려 노력해야 한다는 점은, 결과적으로 그들 자신이 영원토록 주류가 되지는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헨리는 스파이 노릇을 하며 자신의 순종적이고 선량한 아시아인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그와 동시에 ‘아시아인’같은 언어를 사용하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영어를 완벽하게 구사하지만 언제나 ‘아시아인’으로서의 긍정적인 면모를 유지해야 하고, 동료로부터 “아시아인과 함께 일해서 좋다”(420pg)라는 평을 받는다. 이러한 태도는 다소 이중적으로 보이지만 주류 사회를 향한 열망이 반영된 것이라는 점에서 결국 ‘소수자들의 생존 방식’이 서로 다른 형태로 구현된 것에 다름아니라고 볼 수 있다.
결국 주류 사회가 향유하는 ‘언어’는 소수자들에게, 라캉식으로 표현하자면 ‘대상 소문자 a (Object petit a)’인 셈이다. 소수자는 주류 사회가 가치를 부여하는 특질을 가지고서 그들의 승인을 받지 못하는 한 주류 집단에 쉽사리 편입할 수 없다. 언어는 주류 사회에 가까워지는 수단이기에 언제나 열망의 대상이 되지만 그것이 달성되었다는 이유로 절대 주류가 될 수는 없다. 아무리 완벽한 언어를 구사해도 그것은 ‘모국어’가 될 수 없고, 그렇게 언어는 그들을 끊임없이 굴복시킨다. 누군가의 인정을 받아야만 자신의 주어진 정체성을 지울 수 있는 이들은 사실상 영원히 그 정체성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셈이다.
시장 출마를 꿈꾸며 주류사회에 가까이 다가가려 했던 한국 태생의 정치인 존 강이 “소수민족 정치가가 되고자 하지 않”고, “그런 식으로는 결코 어떤 것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 던(530pg)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소수자들은 원어민의 도움 없이 원어민이 되어야 한다. 그들의 영어에 아시아인, 남미인, 아프리카인, 또는 다른 어떤 소수민족의 발음이 섞여있다는 이유로 그들이 원어민이 아닌 것으로 취급받아서는 안된다. 그 존재가 영원히 인정받기 위해서 그들의 존재는 사회 속으로 어우러져 인식의 대상에서 사라져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헨리의 아들 밋이 언어에 “할아버지와 놀 때 어떻게 된 일인지 의사소통에 전혀 문제가 없었”고(398pg), 또한 “영어와 한국어의 가장 세밀한 단계적 변화들”을 흉내낼 수 있었다는 점(399pg)은 의미심장하다. 두 언어 간의 차이가, 주류와 비주류를 갈라놓았던 가상의 경계가 한 아이의 입에서 무화(無化)된다. 인식되지만 인식의 의미가 없는 차이들, 그것은 다원주의 사회의 희망인 셈이다. 존 강은 몰락하고, 밋은 죽었다. 이상은 당장의 현실에서 실현되지 않고, 미래는 요원하다. 소수자들은 융합하지 못하고 그들끼리의 갈등과 반목을 지속한다. 주류 사회의 차별도 여전하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이야기의 마무리는 그렇게 암울해 보이지 않는다. 현재를 살아가는 헨리와 릴리아는 조금씩 변해가기 때문이다. 릴리아는 언어 교정 치료를 하면서 “언어를 웃음거리로” 만들며 “엉터리로 말해도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564pg). 그리고 “최대한 성의를 다해 아이들 이름을 부른다.”(565pg) 모두 다른 언어를 사용하지만, 그들 모두 “훌륭한 시민”이며, “원주민”이다. 언어교정치료의 일상적인 모습이지만 사실상 모든 구성원들이 인종과 문화를 뛰어넘어 어우러질 수 있는 사회를 예시하는 셈이다.
그러므로 이 작품의 가치는 끊임없이 이상적인 사회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태도에 있다고도 할 수 있겠다. 작품은 위에서 언급한 모든 현실적 어려움들을 인정하면서도 이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끝끝내 그 일을 해내고야 마는 것이다. 그렇게 ‘영원한 이방인’은 ‘원어민’을 꿈꾸게 된다.
'비평'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서사가 문화를 담는 방식: [퀸스 갬빗]의 젠더, [뤼팽]의 인종 (1) | 2021.01.18 |
---|---|
[소설] 렛미인: 소극적 반달리즘 (0) | 2019.06.09 |
예술 비평은 객관적일 수 있는가? (0) | 2019.04.26 |
[소설] 토니오 크뢰거 (0) | 2019.04.09 |
[영화] 메멘토 (0) | 2019.04.09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