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나요?”
“어떤 거요?”
“말하자면,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이라는 것이, 사실은 진짜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그런 생각이요.”
“글쎄요. 어릴 때는 몇 번 해본 것 같네요.”
“그렇죠. 그런데 요즘에 제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어요.”
“참, 쓸데없는 생각으로 인생을 낭비하고 계시네요.”
“인생을 낭비한다는 생각, 그것조차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이 진짜가 아니라면 의미가 없는 것 아닐까요?”
“의미가 없죠.”
“그렇죠.”
“그러면 그렇게 생각하시는 이유라도 있는 건가요?”
“뭐, 이유는 없지요. 이 세계가 진짜가 아니다? 만약 진짜가 아니라 어찌어찌 매트릭스 마냥 탈출했다고 한다면, 그 다음엔 뭐가 있는 걸까요? 그 세계는 과연 진짜인 걸까요?”
“그것도 장담할 수는 없겠지요.”
“그러니, 말하자면 하나의 세계가, 저에게는 ‘진짜’인 이 세계가, 사실은 가짜이든 진짜이든, 의미가 없지 않을까, 하는 그런 생각인 것이지요. 가짜 세계인 이곳에서 무언가를 경험한다면, 저에겐 그게 진짜 경험이 아니냐, 하는 그런 문제이지요.”
“그렇군요.”
“네.”
“그러면, 당신의 행복은, 주변의 환경이 진짜냐, 가짜냐와 무관하게, 당신에게 있어선 진실된 것이다?”
“그렇죠.”
“흥미로운 생각을 갖고 계시네요. 그렇다면 지금 당신을 둘러싼 – 저를 포함한 – 이 세계가, 진짜냐, 가짜냐, 하는 문제에 대해서 계속 생각하고 계시는 이유는 뭘까요? 그런 고민은 의미가 없어 보이는데요.”
“그건 말하자면, 사고를 한 번 더 뒤집는 문제예요. 나를 둘러싼 세계가, 과연 타인에게도 진실된 것이냐, 하는 문제이지요.”
“그건 타인의 존재가 실재한다는 것을 가정하는 건가요?”
“일단은요.”
“어째서죠? 그것도 장담할 수 없는걸요.”
“왜냐면, 제가 그 정도로 똑똑하지 않거든요. 당신의 존재까지 상상해 낼 만큼. 가짜 세계라는 건, 마치 하나의 거짓말을 지키기 위해 수천 가지의 거짓말을 만들어내야 하는 작업이니까요. 제가 당신의 존재를 상정한다는 건, 당신에게 무언가를 물었을 때 튀어나올 수많은 답변들을, 당신의 삶과 모든 경험들과 지식들을 지어내서 – 그것 모두 거짓이겠지요. 실재하지 않으니까 – 다 새로이 지어내야 한다는 말이 아니겠나요. 미안하지만 나는 어제 무엇을 먹었는지도 헷갈려하는, 아주 멍청한 사람입니다. 당신이 나의 상상이라기에는, 당신과 여태껏 나눠왔던 수많은 대화들, 그 새로움과 생경함은 너무 거대해요.”
“그렇군요.”
“그러니까, 제가 만약에 ‘가짜’라고 명명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다면, 그건 세상의 이치를 흩트리지 않고서도 존재할 수 있는 무언가 일 거예요.”
“그렇군요.”
“예를 들면, ‘신’같은 거요.”
“신이요?”
“신은 있든 없든, 우리가 쌓아 둔 수많은 경험과 무관하게 존재할 수 있지요. 없어도 상관없구요. 마치 우주 어딘가에 너무 작아서 도저히 관찰할 수 없는 작은 찻주전자 하나가 둥둥 떠다닌다고 주장하는 것과 마찬가지이죠. 그런 건 관찰할 수도 없고, 어찌 됐든 천문학의 관심은 아니지요.”
“러셀의 찻주전자 말이군요.”
“러셀이 누군가요?”
“있어요.”
“그렇군요. 어쨌든, 하던 말을 계속하자면,나는, 말하자면 인간 하나의 뇌로는 감당할 수 없는 엄청난 용량의 세상에 대해 얘기하고 있는 겁니다.”
“‘엄청난 용량의 세상’이요?”
“네. 말하자면 내 뇌에서 감당할 수 있는 정도의 용량만을 나는 지어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흥미로운 말씀이네요.”
“별거는 아니에요. 예를 들어, 이런 건 어떤가요.”
“오! 어떻게 하신 건가요?”
“저는 손가락을 튕기면 손끝에서 작은 불꽃이 타올라요. 저는 선천적으로 이런 몸을 갖고 태어났어요.”
“손가락을 튕기면 손끝에서 불꽃이 튀어나오는 것이, 선천적으로 얻어진 능력이라고요?”
“네.”
“납득이 되지 않네요.”
“그렇죠. 하지만 이건 가짜일까요?”
“글쎄요. 제 눈 앞에 일단 있는걸요.”
“그렇죠. 이렇게 세상은 당신이 상상할 수 없는 방식으로 당신을 놀라게 합니다. 만약 사람들에게 ‘내가 손가락을 튕기면 손 끝에서 라이터처럼 불꽃이 나오는 사람을 봤어!’라고 한다면, 사람들이 믿을까요?”
“글쎄요, 믿지 않겠지요. 오히려 저를 이상한 사람 취급할 것 같아요. 사실 저도 아직 제 눈을 못 믿겠네요. 당신이 마술사라는 사실 때문에 더더욱.”
“그런 거예요. 감당할 수 없는 엄청난 용량의 세상.”
“그렇군요.”
“사람에 따라, 아주아주 머리가 좋은 사람들은 이런 상상들을 더 많이 해낼 수 있어요. 수많은 가짜들을 논리 정연하게 이어 붙이고, 진실과 거짓의 경계를 무너뜨리죠. 하지만 그 사람들도 한계는 있어요. 세상을 그 사람들이 만든 것이 아니니까요.”
“흥미로운 생각이에요. 그런데, 한 번만 더 보여주실 수 있나요? 아, 정말 대단하네요! 담배 피우시나요?”
“아니요.”
“그럼 조금 아쉽네요. 저는 잠깐 담배 생각이 나서요.”
“뭐, 원하시면 불을 좀 빌려드리죠.”
2
“하던 얘기를 이어서 해 볼까요?”
“좋아요.”
“그래서, 우리가 사는 세계가, 진짜라는 보장은 없지만, 가짜가 아니라는 보장은 있다, 이런 설명처럼 들리네요. 저에게는.”
“그건 제가 드린 말씀을 너무 피상적으로만 이해하신 것 같아요. 저는, 가짜는, 진짜를 흔들지 않을 때에만 가능하다는 말씀을 드리는 거예요. 가짜가 가짜임이 밝혀진다면, 그건 그 순간 하나의 재미있는 이야기책에 지나지 않게 돼요. 예를 들면 ‘평평 지구설’ 같은 거요.”
“그렇군요. 그러면 한 가지 의문이 더 생기는데, 이른바 ‘평평 지구설’을 믿는 사람들은, 어떻게 그 ‘가짜’를 계속 믿을 수 있는 걸까요?”
“좋은 질문이군요. 저는 그런 것을 ‘지적 게으름’이라 말합니다.”
“무슨 말씀인가요?”
“예를 들어, ‘평평지구설’로 설명할 수 없는 현상들이 관찰이 되더라도, 모르쇠로 일관한다는 뜻이지요.”
“그렇군요.”
“어려운 문제는 아니에요. 하지만 지구는 평평하다고 정해두고서 세상을 바라보면, 평평한 지구가 설명할 수 없는 자연의 수많은 현상들은 알아낼 수 없는 불가사의한 세상이 되지요. 마치 제 손끝에서 불이 타오르는 것이 아직까지 당신에게는 불가사의한 현상인 것처럼.”
“들켰네요. 저는 아직도 그 손끝에서 불이 나오는 현상이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 당신이 어떤 속임수를 썼을지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사고를 유연하게 하세요. 당신은 이미 사람의 손 끝에서는 불꽃이 나올 수 없다고 전제하고 세상을 바라보는 거예요.”
“그런가요? 혹시 라이터를 제가 볼 수 없는 손 뒤 어딘가에 숨긴 것은 아니고요?”
“봐 보실래요?”
“음. 확실히 뭔가를 숨기지는 않은 것 같긴 한데…한 번만 더 보여주세요.”
“참, 귀찮게 하시네요.”
“죄송해요. 너무 신기해서.”
“한 번만 더 보여줄게요. 아시겠지만 손가락에 불이 직접 닿으면 좀 뜨거워서. 물론 적응했지만요.”
“아, 죄송합니, 아! 감사합니다. 잠깐만, 아, 정말 아무것도 없네요.”
“속임수 안 써요, 저는.”
“직업이 마술사라면서요?”
“그렇죠.”
“그런데 속임수를 안 쓰세요?”
“안 쓰지요. 사람들이 속임수를 쓴다고 믿고 보는데, 그게 어떻게 속임수인가요.”
“아, 뭐, 그렇다면 그렇지요.”
“아무튼, 당신도 일종의 지적 게으름을 안고 살아가는 겁니다. 세상의 답을 미리 정해뒀어요. 그렇게 살면 안 되지요. 저 같은 사람을 모르고 세상을 살았다면, 저 같은 사람이 없는 세상에서 통용되는 법칙들을 만들어 뒀을 거예요. 하지만, 저 같은 사람을 본 이상, 제가 있는 세상의 법칙을 만들어야겠지요. 그걸 누군가는 ‘진보’라고 하고, 누군가는 ‘변화’라고 하고, 누군가는 ‘수정’이라고 하죠.”
“그렇지요.”
“아무튼, 진짜와 가짜라는 것은, 이렇게 때에 따라 가벼운 것일지도 몰라요. 진실들도 어리석은 누군가에겐 가짜로 치부될 수 있지요. 그러므로 진짜와 가짜를 구분할 수 있는 능력은, 조금의 지적 게으름도 용납하지 않는 사람에게만 허용되는 특권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렇게 볼 수도 있겠네요.”
“눈 앞에 놓인 진실을 믿는 것, 그것만큼 어려운 일이 없죠. 꾸준하기 힘든 일이죠.”
“흠. 아무래도 저는 담배를 한 대 더 피러 나갔다 와야겠어요.”
“이번에는 본인 라이터 쓰세요.”
“혹시, 어딘가에 숨겨둔 연료가 다 떨어진 건 아니죠?”
“아이, 참.”
“흐흐, 감사합니다.”
3
“자, 그러면 이제는 과연 눈에 보이는 것이 진짜 존재하는 것인지 어떻게 알 수 있느냐 하는, 좀 더 심오한 차원의 문제로 나아가야 할 때가 된 것 같아요.”
“벌써 어렵네요.”
“어렵지요. 하지만 가짜와 진짜를 구분하는 문제는, 눈 앞에 보이는 것을 어떻게 믿느냐 하는 근원적인 질문에서부터 시작합니다. 말하자면 감각이 어떻게 진실이 되느냐 하는 문제이지요.”
“네. 일단 들어보죠.”
“일단, 우리 감각의 본질에 대해 얘기해봅시다. 내가 당신 앞에 앉아있다는 사실을, 당신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글쎄요, 일단은 제 앞에 앉아있는 게 제 눈에 보여요.”
“맞아요. 당신의 눈은, 빛 에너지를 감지하는 하나의 센서 같은 겁니다.”
“센서요. 그렇죠. 납득이 가네요. 감각기관은 센서 같은 거니까요.”
“특정한 파장의 빛 에너지에만 반응하는 센서가 있다고 생각해보세요. 예를 들면 파란색에만 반응하는 거예요.”
“네.”
“그러면 그 센서에게 빨간색 종이를 보여준다면 반응하지 않겠지요?”
“그렇죠.”
“그렇다면 빨간 종이는 없는 것일까요?”
“그건 아니죠?”
“그러니까, 당신이 ‘있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그곳에 있기 때문에 당신에게 인지된 것이 아니라, 당신에게 인지되었기 때문에 ‘있다’라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이죠.”
“음, 그렇군요.”
“사람들이 간과하는 것은 이 사실이에요. 말하자면 눈 앞에 놓인 것이 거대한 진실의 일부분일 뿐인데도 불구하고, 볼 수 없는 것들, 관측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아요. 즉, 우리의 지적인 게으름은, 이제 눈 앞에 보이는 것을 믿지 않는 것을 믿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눈 앞의 것만이 전부라고 믿게 하는 것까지 손을 뻗칩니다. 하지만 이건 그럴 수밖에 없어요. 쥐가 이산화탄소 냄새를 맡을 수 있다는 사실에 관심을 갖는 사람은 사실 많지 않아요. 알고 계셨나요?”
“그건 몰랐어요.”
“하지만 우리 모두 이산화탄소의 존재를 알아요. 우리의 감각기관으로는 볼 수 없지만, 지적인 노력의 결실로 알게 됐죠.”
“지적인 노력.”
“지적인 노력이죠. 무언가를 알아낸다는 것은, 결국에는 눈 앞에 놓이지 않은 것이 있다는 상상에서 출발하는 거니까요. 예를 들어서, 내가 당신 눈 앞에서 손가락으로 불을 뿜는 것을 보여준다고 해서, 당신이 곧이곧대로 믿지 않는 것처럼 말이죠.”
“아까 그걸 당신은 지적 게으름이라고 하셨죠.”
“맞아요. 그것조차 저는 결과론적인 것이라고 말씀드리려는 겁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두 가지 대립하는 가치를 두고 거대한 전투를 치릅니다. 한쪽 끝에는 완고한 헤게모니가 있어요.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예외 없이 작동하는 거대한 질서. 그 질서에는 지금까지의 경험이 모두 일렬로 늘어서 있습니다. 마치 하나의 거대한 기계가 정교한 톱니바퀴에 의해 끊임없이 칙칙거리듯 말이죠. 다른 한쪽 끝에는, 그 톱니바퀴 사이에 낀 작은 모래 알갱이들이 있어요. 모래는 끊임없이 톱니바퀴에 흠집을 냅니다. 궁극적으로는 그것을 멈추게 하려는 목적을 갖고 탄생한 존재들이죠. 정교한 기계는 그 모래를 없애려 합니다. 톱니의 거대한 힘으로 그걸 눌러서, 으스러뜨리고, 그렇게 먼지가 된 모래는 다시 그 기계의 연료가 되어 종국에는 하나의 톱니로 변합니다. 많은 모래는 기계의 오작동을 일으키고, 망가뜨리지만, 적은 양의 모래는 점점 더 기계를 강하게 만듭니다. 지적 게으름은, 그러므로 어느 정도는 ‘거들떠보지 않아도 되는 것은 거들떠보지 않는’ 지혜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어요”
“점점 알 수 없어지는데요. 진짜 존재한다는 것은 그래서 어떻다는 것이죠?”
“당신이 존재한다고 믿는 것이, 거대한 존재의 조각이라는 말입니다. 뭐랄까, 안에서 잠긴 문 같은 거예요. 당신은 문이 잠겼다는 사실만으로 누군가가 그 안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그 안에 누가 있을까요? 그러나 드물게 안에 아무도 없는데 모종의 이유로 문이 잠겼을지도 몰라요. 이번에는 어떤 경우일까요? 그걸 확인하려면 우리는 두려움을 감수해야 합니다. 지적 게으름과 지적 허영심 사이의 전투. 우리는 그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면서도, 어찌 됐든 무언가를 해내면서, 조금씩 앎의 영역을 확장해 나가고 있어요. 하지만 잠긴 문을 열면 언제나 눈 앞에는 새로운 문이 나타나죠. 하지만 우리는 그 문에서조차 단서를 얻으려 해요. 인식의 확장은 그런 식으로 이루어지고, 거대한 기계에 톱니를 하나씩 더해나가고, 종국에는 세상이라는 거대한 시뮬레이션을 돌릴 수 있을 만한 정교한 컴퓨터를 하나 만들어 나가려 하죠.”
“그렇다면, 당신이 손가락을 튕겨 손끝에 불을 붙이는 것을 저는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나요?”
“당신의 눈을 믿으시나요?”
“글쎄요. 저는 여태껏 그렇게 살아왔는걸요.”
“담배나 한 대 더 피고 오시죠.”
“아니요. 일단 오늘 대화는 여기서 끝내는 게 좋겠어요.”
“그럼, 아쉽지만, 불은 붙여드릴게요.”
“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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