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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글

2020년: 살아보니 이렇더라

by 고우 2020. 12.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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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란 것은 켜켜이 쌓여가기 마련이다. ‘쌓여간다’라는 표현은 너무나 수직적인 방향성을 가진 단어라 단편적이라고 생각하는데, 이것 말고는 아직까지 한 사람의 역사를 정의하는 언어적 방법을 잘 모르겠다. 말하자면 한 사람의 성향, 사고방식, 행동 따위가 변화하는 것은 기나긴 삶의 결과물로써 나타나는 것이라는 말이다. 그럼 그렇게 표현하면 되지 뭐하러 ‘켜켜이 쌓여간다’라고 표현하냐고 묻는다면 사실 할 말이 없다. 딱딱 떨어지는 명쾌한 표현들과 시적이고 비유적인 표현 너머의 무언가를 지향하는 것은 분명한 차이가 있다고만 언급하고 넘어가겠다.

얼마 전에 #내가_늙어보일만한_사실을_말해보자 였나, 하여튼 그런 해시태그가 sns상에서 한창 유행할 때가 있었다. 내가 페이스북에서 팔로우 하는 중년 이상의 누군가는 ‘나도 그걸 해보고 싶었는데 그건 진짜 나이든 사람이 하는 게 아니라고 해서 못한다’라는 말을 올려뒀고, 또 다른 누군가는 그 해시태그를 달고 ‘국민학교 다님’이라고 짧게 한 문장 적어서 놔두더라. 사실 나도 그런 걸 해보고 싶은 충동(?)이 들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일단 그건 인싸들이 하는거라 나는 못하고, 무엇보다 ‘과연 나이 들었다’라고 말 할 자격이 어느 시점부터 주어지는 것인지에 대해 고민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냥 재밌자고 하는건데 왜 이렇게 진지하냐고? 모르겠다.

사실 나도 모르게 어느 순간부터 다른 누군가와 대화하다가 ‘살아보니 이렇더라’라는 표현을 종종 쓰곤 할 때가 있다. 그게 스스로 일종의 오만처럼 느껴질 때가 많아 최대한 자제하려고 하는 표현인데, 안타깝게도 대체할 말이 별로 없다. 살아보니 속 시원해질 말은 최대한 입 밖으로 안 꺼내는게 좋더라, 살아보니 사람이 너무 가벼워보이면 안좋더라, 따위의 말들. ‘내 경험상’도 비슷한 표현인데, 내가 경험을 해봤으면 얼마나 해봤을 것이며, 나의 경험을 타인의 경험에 적용해 판단하는 것은 또 얼마나 경솔한가. 경험이라는 것은 한 개인의 얼기설기 얽힌 두루뭉술한 귀납 추론일 뿐이다. 그리고 ‘살아보니’ 그런 태도는 꼰대들이 많이 보여주더라. 그래서 나이를 먹을 수록 일종의 회의주의에 빠지지 않기 위해 ‘올바른 삶의 지향점’이라는 것이 있을 것이라고 가정하고 살아가면서도, 동시에 타인의 생각, 사고방식 등을 ‘나의 지향점’에 비추어 함부로 판단하지 않으려 노력하는 것은 아직 나에겐 너무나도 버거운 일이다. 언어는 확정적이고, 겨냥하는 대상을 재빠르게 휘감고 잘라내기 때문에 그런 판단들을 입 밖으로 꺼내는 것은 더더욱 지양해야 할진데, 그건 훨씬 어렵다.

경험은 그냥 살아가면 살아갈 수록 쌓이는 것이다. 마치 은행 예금의 이자처럼, 그건 어떠한 보상도, 자랑거리도 될 수 없다. 만약 예금 이자가 물가상승률보다 낮다면, 난 사실상 돈을 잃은 것이다. 삶도 그렇다. 내 나이때 마땅히 해야 할 생각들, 성장들-그게 어떤식으로 나에게 주어졌든 간에-을 해내지 못하면, 나에겐 ‘나잇값을 못한다’라는 꼬리표가 붙을 것이다. 그걸 나 스스로 붙이지 못하고 남들이 직접 붙여줘야 하는 지경에 이르면, 참 큰일난거다. 아무튼, 2020년도 그렇게 나에게 와서 소복하게 쌓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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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의 경험에서 조금씩 얻게 되었다고 자부할 수 있는 능력은, 세상을 멀리, 천천히 보는 방법을 터득한 것이 아닐까 싶다. 고등학교 때는 짧으면 한 주, 길면 두세 주 앞의 시험, 이벤트 등에 대해 생각하면서 살았다면, 지금은 짧게 잡으면 한 달, 길게 잡으면 서너 달 정도의 계획을 갖고 살아간다. 놀랍게도 이런 계획들은 몇 년 뒤의 무언가를 조금이나마 지향하고 있다. 당장의 결과물이 나오지 않더라도 좌절하지 않고, 좋은 성과물이 눈 앞에 뚝 떨어져도 함부로 기뻐하지 않는 태도를 배워가고 있다고 해야 하나. 사람이 너무 느긋해지는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들지만, 덜어낼 것을 덜어내고 가벼운 몸이 되어 한 발 한 발 신중하게 내딛는 기분이 들어 좋다. 아래의 것들은 이 ‘멀리 보는 태도’의 부차적인 효과이다.

우선, 어떤 생각을 지나치게 빨리 하는 일이 줄었다. 그랬다가는 일을 그르치기 십상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어떤 대상을 천천히 바라보고 있자면, 처음 그것을 마주쳤던 순간의 감정에 의해 좌우되었던 당시의 생각이 조금은 보정된다. 그 과정에서 믿을 만한 주변 사람들, 검색 등을 곁들이면 금상첨화다. 그렇게 해서 내린 판단은, 순간의 감정에 의해 휩쓸려서 내린 판단보다 결과적으로 더 ‘나쁜’ 판단이었다고 할지라도 그 과정 자체가 의미 있다.

비슷하게, 말을 함부로 내뱉는 습관도 조금은 줄어든 것 같다. 이건 앞서 말한 생각의 속도와도 연관된 문제이긴 한데, 동시에 나 자신의 품격과도 깊게 관계맺고 있다. 말을 함부로, 자주 내뱉으면 그 질이 떨어지기 마련이고, 스스로가 그 말에 사로잡혀 생각을 방해하고, 결과적으로 사람을 추하게 만든다.

이처럼 인생을 좀 더 멀리, 천천히 바라보면서 판단하고, 행동할 수 있게 된 것은, 스스로 항상 나에게 부족한 속성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나에겐 일종의 진보다. 그래서 나는 ‘나이를 먹으면서’ 나타나는 이런 변화를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동시에 잃게 되는 것이 있으니, 기민한 판단력이라던가, 겉보기엔 허무맹랑한 것처럼 보이는 도전정신이라던가 하는 것들이다. 말하자면 ‘젊은이의 기질’. 그렇기에 중요한 것은 중용이다. 충분히 시간을 갖고 무언가에 대해 생각하면서도 너무 늦지는 않게끔 시의적절한 선택을 하는 것. ‘중용’에 성공했는지 여부를 어떻게 판단할까? 생각을 해봐야겠지만 언뜻 떠오르는 것은 결과 말고는 없는 것 같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래서 나는 살면서 당연히 얻게 되는 경험치들을 제외한 무언가를 더 얻어서, 실질적으로 성장했느냐는 것이다. 이건 지금 판단할 문제는 아니다. 확실한 것은 삶은 지속될수록 힘겨워지기만 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 그럴 가능성이 높으며, 오늘 내린 판단의 의미는 한참 뒤에, 그것보다도 더 한참 뒤에 서서히 그 의미가 드러날 것이며,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꾸역꾸역 당면한 하루들을 먹어치우며 소화해내는 것뿐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내가 뭘 먹어치우고 있는지, 뭘 먹어야 할지 조금씩 배워나가고 있다.

그렇게 나는 2020년을 살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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