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이 채 50일도 남지 않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사실 대학 입시를 한 지 좀 되기도 했고, 수능으로 대학에 간 것도 아니기 때문에 수능에 대해선 수험생들에게 딱히 해줄 말이 없지만, 나의 입시경험을 토대로 수험생들 입장에서 이해가 될 수도, 이해가 되지 않을 수도 있는 글을 써보려 한다.
나는 17년도 연세대학교 경제학부에 다니다가 반수를 통해 18년도 서울대학교 경제학부로 학교를 옮긴 사람이다.(17년도 입시 결과는 연대경제 학생부교과, 학생부종합, 고대 경영 학생부종합 합격이었고 서울대 자전 지균전형 불합격이었다) 의무 채플 이수의 좆같음과 연세대 1학년을 다니는 동안 어머니의 일단 써보기나 하라는 강한(?) 권유로 17년도 자소서를 수정해 서울대학교에 제출해 1차에 합격했고, 다행히 면접도 무난히 통과했다. 18년도에는 자유전공학부에 붙기 쉽다는 지역균형 전형으로 도전했다가 실패했는데, 묘하게 점수컷은 더 높은 경제학부를 같은 스펙으로, 일반전형으로 붙은 것이다. 그래서 나는 17년도 서울대 면접 탈락을 전략적인 실패로 본다. 자유전공학부 친구들을 보면 확실히 어디 하나 유별난 구석이 있는데 나는 그런건 없었다.(그래서 자전 친구들은 아직도 나에게 알게모르게 선망의 대상이다) 수학에 대한 묘한 불안감도 크게 작용했었는데, 경제학부는 면접때 수학문제를 풀어야 한다는 사실이 당시 나에게 큰 부담이었고, 자전을 쓰는데 중요한 변수가 되었다. 그런데 막상 18년도 입시때 가서 봤더니 생각보다(?) 쉬웠다. 즉 나의 실력에 대한 자만과 지나친 겸손 둘 다 갖고 있던 셈.
그렇다고 연대 다닌 1년이 후회였느냐, 하면 그건 절대 아니다. 연대 다니면서 배운 컴퓨터, 저작권법(물론 자드해서 f받긴 했지만..)등은 아직까지도 나의 인생에 큰 도움이 되고 있다. 주변인들의 정신적인 질환도 후에 내가 심리학에 관심을 갖게 된 중요한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17년도 아카라카, 입실렌티, 연고전의 추억은 정말 잊을래야 잊을 수 없다. 하나하나가 모두 즐거웠고, 내가 고등학생때 매일같이 듣던 아이유의 노래를 현장에서 직접 들은 것, 노을 지는 저녁을 배경으로 학생들이 휴대폰으로 손전등을 켜 응원봉을 대신하던 모습, 고대를 5대 0으로 이기고 소리치던 장면 등등 모두 생생하게 남아있다. 이 하나하나는 내가 서울대 경제를 쓸 생각을 하지 않고 자전을 써서 서울대에 불합격하지 않았다면 절대 경험할 수 없었을 일들이다. (어떻게 보면 내가 연대를 1학년만 마치고 나온 건 연세대 단물만 빼먹고 나온 것이기도 하다.)
사실 입시 관련해선 나도 수많은 가정들을 하게 된다. 이제 와서 심리학 공부 할 걸 알았다면 의대 가서 뇌과학을 제대로 공부했으면 어땠을까?(그때 순천향대 의대 교차지원 점수컷이 충분히 남았었는데 쳐다도 안봤었다.) 그런데 심리학 공부 할 생각을 의대 갔으면 했을까? 심리학 공부를 시작한 결정적 계기는 서울대 1학년때 심리철학 공부를 한 것인데, 아마도 의대에선 불가능했을 것이다.
또 지금 이것저것 사업을 준비하고 있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고대 경영에 가서 회계원리라도 들어보는게 낫지 않았을까? 그런데 경영대 갔으면 지금같은 사업 아이템, 사업 파트너를 만날 수 있었을까? 그것도 잘 모르겠다.
진로라는건 이처럼 언제든 바뀔 수 있는 것이고, 삶이란 살아온 과거가 켜켜이 쌓여 현재를 이루는 것이므로 이러한 가정들이 모두 무의미하다. 우리는 삶을 마치 "삶"이라는 단어처럼 객관적인 대상으로 생각하게 마련이지만, 사실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게 아니라 삶이 우리를 관통하는 것이다. 더군다나 대한민국 중등 교육 여건상 진로나 삶의 방향성에 대한 심도깊은 고민을 하는 것을 사실상 불가능한데, 그 안에서 아무리 날뛰어봤자 나무위키에서 검색하는게 백번 나을 정도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그러니 그냥 현재를 충실히, 그럼에도 미래를 끊임없이 고민하며 살아가라는 말을 해주고 싶다. 수많은 "치"들은 수능이 망하면 인생이 망할것처럼, 수능 하나 잘 봐서 인생에 탄탄대로가 펼쳐질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이건 누군가에겐 맞을 수도, 누군가에겐 틀릴 수도 있는 말이다. 우리는 수많은 선택들을 내리며 살아가지만, 그 선택들의 의미는 시간이 한참 지난 후에야 서서히 밝혀지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현재 최선의 선택을 하되, 지나고 나서 그때 내린 최선의 선택을 후회하지는 말라고 얘기해주고 싶다. 가끔 주변 친구들에게 삶에 대해 이야기할 때 백 개의 점을 평면에 무작위로 찍어두고, 그 점들을 모두 잇는 가장 짧은 경로를 찾는 비유를 많이 들곤 하는데,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그런 경로를 곧바로 찾는 알고리즘은 아직까지 세상에 없어서 모든 경로를 다 찾아봐야 한다. 당장 돌아가는 것 같아도 나중에 보면 가장 빠른 길일 수도 있고, 당장은 빠른 길 같아 보여도 한참 돌아가는 길의 초입일수도 있다.
그러니 삶을 가정들로 채우지 말도록 하자. 그냥 뿌듯이, 꿋꿋하게 살아가면 되는 것이다.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하고, 결과가 나오면 그것이 운에 따른 것이든, 실력에 따른 것이든 그 자체를 받아들이고, 다시 버텨내면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렇게 최선을 다 했던 스스로를 사랑하고, 아껴주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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