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몇 년 전 온라인으로 고민상담 채팅방을 운영한 적이 있다. 사람들은 시시때때로 들어와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았고, 나는 그날 기분에 따라 무미건조하게, 적극적으로, 따듯하게,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상담의 질은 매번 달랐을 테지만, 이름도 모르는 타인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이유만으로도 그들은 감사해했고, 나는 그 사실 자체에 보람을 느꼈다.
그 일에 보람이 아닌 충격을 느꼈던 때는 어느 날 밤 갑자기 채팅방에 접속한 익명의 누군가에게 자신이 곧 자살을 앞두고 있으며, 대화가 끝나면 자살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였다. 나는 내가 말을 꽤 잘 하는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사람의 굳은 결심은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바뀌지 않았다. 그 때 충격을 받아 페이스북에 글을 올렸고, 지인들에게 당치않은 위로의 말을 듣기도 했다. 뭐 자랑이라고 그런 글을 올렸나 싶지만, 그냥 털어놓을 대상이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사실 그땐 꽤 큰 충격적을 받았지만, 지금은 자살했을지도 모를 그 사람과의 대화 내용은 별로 기억에 남아있지 않다. 내일 이 시간에 다시 연락하라는 나의 말에 ‘미안해’라는 답변을 듣게 된 대화의 결론만 어렴풋이 떠오를 뿐이다. 오히려 나의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관 분들이 ‘위치정보도, 이름도 모르는 사람과의 익명 채팅만 가지고는 어떤 수사도 할 수 없다. 정 수사를 하려면 영장을 받아서 카카오톡 서버를 뒤져보는 건데 적어도 2주일은 걸린다. 알다시피 죽으려면 진작 죽었을 때라, 그때 가서 서버를 뒤지는 건 의미가 없을 거다’라는 설명을 했을 때, 내가 그걸 받아들이지 못하고 ‘단순히 의지가 없는게 아닌가요.’라고 반문했을 때 그분들의 어이없어하던 표정이 오히려 인상깊은 기억으로 남아있다. 갑자기 주어진 ‘죽음’이라는 책임감 앞에 나는 얼마나 망연자실했던가.
사실 그 뒤로도 자살을 앞둔 사람이 한 번 더 들어왔었고, 결과는 똑같았다. 나는 최선을 다했고, 역시 정해진 결과를 바꾸진 못했다. 친구가 필요하다는 말에 내가 친구가 되어주겠다고 했으나, 그런 건 사실 말장난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 사람은 알고 있었다. 그땐 충격을 좀 덜 받았던 것 같다. 기억에 남는 장면은 그 대화를 하며 역삼역을 나갈 때 보았던 매우 일상적인 풍경의 계단.
첫 번째와 두 번째 대화 때 받았던 충격의 강도가 달랐던 이유는 단순히 ‘한 번 겪어본 일’이기 때문인 것도 있지만, 죽음이라는 것이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아주 오래 전부터 시작된 거대한 ‘과정’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인 것도 있다. ‘과정’이라는 것은 누구나 알다시피 작은 단계들로 이루어져 있고, 마치 암세포를 조기에 발견해야 치료가 가능하듯 자살 징후 또한 조기에 발견해야 적극적인 개입을 통해 예방이 가능한 것이었다. 이미 모든 마음의 정리를 다 끝내고 자신의 세계관에서 완벽하고 단단한 스키마가 생성된 다음엔 물리적인 개입이 아니라면 어떤 수단으로도 그 사람의 죽음을 막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물리적인 개입으로 자살을 막는다 한들, 의미 없는 그것이 연명치료와 다를 바가 무엇일까? 때때로 생명은 너무나 무책임하게 되살아난다.
누군가가 스스로의 죽음을 생각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어떤 식으로든 징후를 나타내기 마련이다. 가장 쉬운 것은 malfunction이다. 어느 순간부터 일상생활이 무너져 있는 것이 보인다면 주변에서 먼저 보살펴 주어야 한다. 자살을 생각하고 있지 않더라도 심각한 우울증을 앓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자신의 우울함을 억지로 감추려 드는 사람들이 많기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우울감과 좌절감의 신호를 포착하기란 쉽지 않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여도 속은 썩어 들어가는 사람들이 정말 많다.
그 신호를 포착하지 못한 것이 비난의 이유는 될 수 없다. 그건 마치 2008년 금융위기를 매우 소수의 사람들만이 예측한 것과 같은 이유이다. 아무리 경제학을 열심히 공부한들 다시 2008년으로 돌아가라면 금융위기의 징후를 포착할 수 있을까? 신호는 언제나 우리 곁에 존재한다. 다만 한때 소음이라고 여겼던 모든 것들이 너무 늦게 신호였음이 밝혀질 뿐이다. 자살도 마찬가지다. 시간이 지나고 난 뒤에야 서서히 그 사람이 했던 행동, 말, 표정 하나하나에 의미가 실려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거대한 열차의 모습이 그려지기 마련인 것이다.
“절대 자살할 사람이 아니다”라는 주변인들의 말은, 그래서 어디까지나 살아있는 자의 항변이다. 자신도 모르게 타인이 죽어가는 것을 방관하고 있었음을 도저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치열한 최후변론이다. 그러나 종국에 이르면, 그들은 자신들이 영원히 속죄할 수 없는 죄를 지었음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내가 2년 전의 어느 이름 모를 사람의 죽음에 책임감을 느끼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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