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막을 건너는 법: 영화 『메멘토』가 그리는 극사실주의 인생
살아가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을 때 거기에 확신을 가지고 대답할 수 있는 사람들은 얼마 되지 않을 것이다. 설사 삶을 통해 성취하고자 하는 일이 있을지라도, 거기에 끊임없이 ‘왜?’라는 질문을 꼬리에 꼬리를 물고 던지면 결국에는 할 말을 잃게 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뤽 베송 감독의 영화 『그랑블루 (Le Grand Bleu, 1988)』에서 잠수부인 주인공 자크는 연인 조안나와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눈다.
“가장 힘든 건 바다 맨 밑에 있을 때야.”
“왜?“
“왜냐하면 다시 올라와야 할 이유를 찾아야 하거든. 난 항상 그걸 찾는 게 너무 어려워.”
인간은 물 속에서 숨을 쉴 수 없고, 당연히 바다 밑바닥에서 올라오지 않는다면 죽을 것이기에, 올라와야 할 이유를 찾는 일이 어렵다는 그의 대사는 자못 의미심장하다. 혹시 그는 살아가야 할 이유를 끊임없이 찾아 헤맸던 것은 아닐까?
그러나 이런 대사가 있다고 해서 『그랑블루』를 삶의 목적이나 이유에 관한 문제를 깊이 있게 다루는 영화로 해석하는 것은 곤란하다. 두 남자의 우정, 자크의 내면에 깊게 파고들어 있는 고독, 연인 간의 사랑 등, 자크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복잡한 감정선들을 모두 다루기엔 3시간에 가까운 러닝타임도 역부족인데, 그런 질문까지 다루기를 바라는 것은 영화에 너무 많은 것을 바라는 것일 테다.
이에 비해 『메멘토』는 삶의 이유에 관한 고뇌만을 끈질기게 해낸다. 『그랑블루』가 독립성을 가지고 움직이는 감정선들의 아름답고도 슬픈 조화를 그린다면, 『메멘토』에 나오는 모든 감정선들은 ‘왜 사는가?’라는 단 하나의 질문만을 향해 미친 듯이 질주하는 것이다.
거슬러 올라갈 수록 드러나는 불편한 진실
『메멘토』에서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플래시포워드’라는 독특한 영상편집 기법을 전방위적으로 활용해 사건의 결말이 영화의 시작부분에, 사건의 시작은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 배치되도록 한다. 모든 사건을 역순행적으로 보여주면서 사건의 근본을 쉬지 않고 추적해가는 동시에, 관객들로 하여금 단기기억상실증에 걸린 레너드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밖에 없도록 강요하는 것이다. 그러나 감독의 천재성은 단순히 관객들에게 레너드의 시선을 주입시키는 데에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레너드의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면서도 그의 상황을 누구보다도 객관적으로 인식할 수 있게 한다는 데에서 드러난다.
주인공 레너드는 단기기억상실증을 앓고 있다. 위험에 빠진 아내를 구하려다 뇌에 손상을 입어 기억을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가 가진 장애는 단순히 기억을 하지 못하게 된 고통 정도로만 치부될 수도 있겠지만, 깊게 생각해 보면 기억하는 능력의 상실은 자아상의 상실을 의미하기도 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자신의 현재 모습을 돌아볼 길이 없이 과거의 기억들로만 현재를 살아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자신이 어떤 사람이며, 지금 무엇을 하고 있고, 당면한 문제는 무엇인지 그는 알 길이 없다. 다만 그는 그의 마지막 기억을 붙잡고 아내를 죽인 범인을 잡아야 한다는, ‘그가 앞으로 해야 할 일’만을 알고 있을 뿐이다. 가진 것이라고는 과거뿐인 자에게 허락된 것은 끊임 없이 미래 속을 부유하는 것뿐인 셈이다.
그러나 레너드와 달리 관객들은 기억에 장애가 없다. 따라서 관객들은 영화가 진행되면 진행될수록 알지 못했던 주인공의 모습들을 조금씩 알아가게 되고, 따라서 영화의 시작 부분에선 완전히 레너드의 관점으로 사건을 바라보게 되지만 영화가 끝날 때쯤엔 사건의 큰 흐름과 그 속에서 방황하는 주인공에 대해 한 발자국 떨어진 상태에서 객관적으로 인식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관객이 마주하게 되는 레너드의 일그러진 자아는 그리 유쾌하지는 않다. 영화의 뒷부분으로 갈수록 주인공 레너드가 스스로 현재를 인식할 수 있도록 만들어 낸 ‘메모의 체계’를 자기 손으로 붕괴시킨다는 사실이 점점 더 분명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관객들은 ‘레너드는 어떻게 범인을 죽이게 된 것일까?’라는 영화 초반에 스스로 던졌던 질문은 잊고 ‘레너드는 왜 저런 행동을 할까?’라는 바뀐 질문을 던지게 된다. 메모는 기억을 하지 못하는 레너드가 그의 ‘현재’를 인식할 수 있게 해주는 유일한 수단으로 기능하기에, 기록을 없애고 조작하는 그의 행동이 관객들로선 단숨에 이해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관객들은 그 답을 영화의 마지막 10분, 즉 레너드가 자신의 참담한 현실을 마주한 순간에 깨닫게 된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관객들은 그의 감정 가장 깊은 곳으로 빨려들어가게 된다.
현실을 마주할 수 없을 때
“내가 찍은 거야, 네가 복수했을 때. 이 행복한 표정을 봐. 또 한 번 보고 싶군.”
“고맙기도 해라.”
“웃기지 마. 난 네게 살아갈 이유를 줬고, 넌 기꺼이 응했어.”
아내를 강간한 범인을 쫓는다는 주인공 레너드의 로맨틱한(?) 모습이 사실은 왜곡된 기억과 조작된 기록으로 점철되어 있는 허구 그 자체였음은 작품의 마지막에 가서야 테드와 레너드의 대화를 통해 비로소 밝혀진다.
레너드의 자아상엔 아내의 죽음을 맞이한 과거밖에 남아있질 않고, 복수를 한 이후의 ‘현재’의 그는 존재하지 못한다. 그렇기에 그는 미래의 어느 시점에 복수를 해야 한다는 끊임없는 강박에 시달리며 살아가야만 하는 것이다. 따라서 복수를 끝내버린 레너드는 복수가 끝났다는, 그 자신에게만큼은 모순된 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고, 따라서 그는 그가 다시는 현실를 마주할 수 없도록 모든 진실을 알고 있는 테디를 죽여야만 했다. 그냥 죽여서도 안 된다. 그는 살인자가 아닌, 어디까지나 아내를 위해 복수를 하는 사나이여야만 했다. 그것이 그가 살아가는 이유이기 때문이다.
레너드는 풀리지 않는 퍼즐을 원하지 않았다. 그저 영원히 퍼즐의 완성을 위해 퍼즐조각들을 찾아 다니길 바랐을 뿐.
가장 근본적이지만 벼랑 끝에서야 비로소 던지는 질문
모든 사건의 시작은 “살아갈 이유”에 대한 질문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영화는 마지막 순간까지 그 질문을 아껴두었다가, 비로소 다음과 같이 관객에게 묻는다.
“당신은 당신이 계속 살아가야 하는 이유를 알고 있습니까?”
가장 근본적인 질문을 맨 나중에야 던진다는 것은 실제 우리의 삶과 유사하기에, 그 안에 숨어있는 의미는 의미심장하다. 이런 류의 질문은 인간이 삶의 모든 것을 잃고 가장 밑바닥까지 추락해, 죽음 말고는 다른 탈출구를 찾을 수 없을 것만 같은 상황에 직면할 때에야 비로소 조심스레 꺼내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학창시절에 서영은 작가의 단편소설인 『사막을 건너는 법』을 읽은 일이 있다. 월남전 이후에 무기력하고 무감각한 일상생활에 적응하지 못하던 주인공 남자와, 그런 그의 눈에 들어온 이상한 늙은이 하나가 기묘한 평행선을 달리는 묘한 소설이다. 이 늙은이의 아들은 월남전에 파병됐다가 살아서 돌아오지 못했고, 그의 손녀딸 또한 교통사고로 죽어 길에서 주워온 병든 개 한 마리와 함께 살아가는 중이었다. 사랑하는 이를 잃고 매일 외로움에 사무치며 살아가는 그 늙은이가 택한 삶의 방식은 조금은 독특했는데, 아들이 받은 훈장을 스스로 버리고선 그것을 찾아 헤매는 척 하고, 주워온 개를 아들이 키우던 개로, 교통사고로 이미 죽어버린 손녀딸을 매일같이 밥상을 차려주는 살아있는 존재로 둔갑시키는 것이 그것이다. 모든 것을 잃고 아무런 희망 없이 살아가는 노인에게 삶이라는 것은 끝없는 좌절과 고통만이 도사리는 ‘사막’이었고, 그러한 사막 위에 허무와 허구로 모래성을 쌓아가는 것이 그가 ‘사막을 건너는 법’이었던 것이다.
살아갈 수 없는 이들이 살아가는 방식은 이토록 참혹하다. 레너드의 모습을 보며 『사막을 건너는 법』의 할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어쩌면 레너드와 할아버지 모두 받아들이기 힘든 삶을 어떻게는 견뎌보려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메멘토』는 실존의 냉엄하고 준엄한 얼굴을 마주한 순간에 한 인간이 어떤 선택을 할 것이며, 어떤 모습을 보여줄 것인지, 그 모든 것들을 남김없이 기록하고 있다. 레너드가 마주한 상황은 분명 보통의 상황은 아니다. 그러나 레너드의 모습을 보며 관객들은 일상생활 속에서라면 마주하기 힘든 실존적 상황을 레너드와 함께 마주하게 되고, 그의 눈으로, 그러나 동시에 객관적으로 그 고통의 본질에 다가서게 된다. 그리고 어느 순간 레너드의 문제를 자신의 문제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한 개인의 이야기가 인간 전체의 문제로 확장되는 순간이다.
영화는 작품 속에서 레너드의 선택에 대해 어떠한 판단도 내리지 않는다. 모든 판단은 오로지 관객의 몫으로 남겨두면서, 각자의 삶은 각자에게 그 몫이 있음을 천명하는 셈이다. 관객들이 어떠한 보호장비도, 무기도 없이 맨몸으로 실존적인 문제를 마주하도록 하는 것. 『메멘토』의 가치는 바로 거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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