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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소설] 토니오 크뢰거

by 고우 2019. 4.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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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니오 크뢰거의 이원적 세계관

 

토니오 크뢰거 책표지

 

인간은 인간이 지닌 인식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가?”

이 질문은 초견적으로는 상당히 오만한 것으로 보인다. 이 질문을 한다는 것은 인간 인식의 한계한계 너머의 것에 대해 알고 있다는 사실을 전제로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 자신이 인간인 이상, 우리가 우리 자신의 한계를 어떻게 인식할 수 있을 것이며, 그 한계가 존재하는 이상 한계 너머의 것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은 마치 앞을 못 보는 어부가 너무 작아 자신의 그물망을 다 빠져나가버리는 물고기들을 관찰하려는 수준의 노력을 요한다. 단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대상, 단 한 번도 인식해보려 하지 않았던 대상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이 존재를 파악하려는 시도는 사실상 우리가 가진 세계관을 완전히 이해하고, 동시에 그것을 깨부수는 작업을 요한다. 그러니 인간 주제에저런 질문을 함부로 던지는 것은 상당한 용기와 무지를 요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인간의 능력을 지나치게 과신하지 않으면서, 오히려 매우 나약한 존재로 상정한 채로 위의 질문에 끊임없이 도전하는 방법은 전혀 없는 것일까? 인간 인식의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그 너머를 엿보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 토마스 만의 「토니오 크뢰거」는 이 질문을 가장 직접적으로 다루면서도 그 나름의 해결책을 도모한다는 점에서 눈여겨볼 만한 작품이다.

작품은 토니오 크뢰거라는 인물의 삶을 다룬다. 이 인물은 상당히 독특한 면모를 지니고 있는데, 바로 예술가적 기질을 가지고 있으면서, 동시에 보통의 사람들이 영위하는 삶의 모습들을 동경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점이 그러하다. 무언가를 동경하는 행위는 상당히 의미심장하다. 무언가를 동경하기 위해선 동경의 대상과 자신이 달라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보통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그는 그런 삶을 동경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삶을 동경하는 그의 태도는, 삶에서 떨어져 나와 멀리서 바라볼 수밖에 없는 자의 고뇌가 담긴 단어가 아닐 수 없다.

어린 토니오는 자신이 예술가의 눈으로 바라보는 세계와 타인이 범인(凡人)의 눈으로 바라보는 세계가 엄연히 다르다는 사실을 타인을 자신의 세계에 초대하려는 시도와(한스 한젠), 자신이 타인의 세계에 들어가려는 시도(잉게보르크 홀름)를 한 후, 처절한 실패를 경험하고 나서야 깨닫게 된다. 누구에게도 이해 받은 적이 없다는 사실은 토니오로 하여금 자신이 문학에서 가진 재능을 부끄러워하게 만들고, 또한 누구에게나 이해 받는, 소위 보통의 삶을 꿈꾸게 하는 계기로 작용한다.

바로 이 동경에서 예술과 삶은 충돌한다. 토니오는 언어적 재능, 즉 삶의 모습을 그 어떤 것보다도 명확하게 표현해 내는 능력을 지녔지만, 동시에 그러한 도구를 사용함으로 말미암아 그 삶으로부터 끊임없이 유리된다. 때문에 그는 언제나 세상과 그 세상의 표현인 예술 중 어느 하나에 속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예술은 세상을 포섭하지만, 세상은 예술에 포섭되었는지 여부와 관계없이 그저 존재한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삶은 그것이 말로 표현되고 처리된 후에도 계속된다.’ 토니오는 예술가적 자질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에 이런 사실을 견디기 버거워했고, 이를 극복하고자 끊임없이 내적인 투쟁을 경험해야 했다.

그러나 작중 토니오가 예술이라는 단어를 제한된 의미의 ‘Fine Arts’를 뜻하기 위해 사용하지 않는다는 점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그에게 예술은, 말하자면 예술적인 모든 것이다. 스스로를 햄릿과 동일시한다는 점에서, 은행원을 예술가로 인정해준다는 점에서, 반대로 예술의 영역에 함부로 발을 들인 자를 경멸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 그가 말하는 예술과 삶의 충돌은 실제로는 예술성과 시민성, 정신과 육체, 이성과 감성 등 모든 상반되는 가치가 충돌하는 장(field)으로 확대해석될 여지가 존재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대립되는 두 개념이 끊임없이 조화되지 못하면서도 양립하는 양상이 토니오 크뢰거의 이원적 세계관을 형성한다. 그리고 토니오는 이 이원적 세계의 한 가운데에 서 있다.

그러므로 작중 서사의 공간적 배경이 남에서 북으로 전개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예술가가 아닌 길을 잃은 시민시민성의 상징인 북유럽으로 가는 것은, 결국 올바른 길을 찾아 나서기 시작했음을 상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정에서 토니오의 예술가적 기질이 이전에 시민적인 것으로 상정되었던 어떤 양상으로 변화하기는커녕 오히려 한스와 잉게를 목격하는 사건을 통해, 그리하여 자신의 심장이 여전히 뛰고 있음을 확인하는 과정을 통해 재정립되는 측면이 있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이는 토니오가 예술이 삶을 지향함과 동시에 삶에 포함되어 있는 복합적인 개념임을 깨닫게 되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렇게 토니오 크뢰거는 길을 잃은 시민이나 양심의 가책에 시달리는 예술가가 아닌, ‘예술을 하는 시민으로 발돋움하고, 이원적 세계는 통합의 길을 모색하기 시작한다.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서 이 소설을 바라보면, 이 소설은 단순히 예술과 삶 사이에서 갈등하는 한 개인의 서사를 그린 것이 아니라 하나의 세계관 속에서 살아가는 개인이 어떻게 다른 세계관을 받아들여 자신의 인식을 확장시킬 수 있는지에 관한 훌륭한 예시가 된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여러 인식 체계들이 층위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수평적인 관계를 맺고 있음을 깨닫는 과정을 요구한다.

토니오 크뢰거는 이 과정을 예술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끔찍하리만큼 집요하게 추적한다. 그 결과 예술은 삶의 총체로 승화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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