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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영화] 파수꾼

by 고우 2019. 4.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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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지층 : 영화 『파수꾼』에 드러난 장소성의 미학

 

 밤이다.

 저 멀리 도시의 희미한 불빛이 반짝이고 있지만, 주인공 동윤이 걸어가는 길은 어둡기만 하다. 그의 불안정한 심정을 위로라도 해주듯 저 멀리 서 있는 가로등은 주황색 빛을 한숨처럼 쏟아내며 거리를 밝히고 있고, 그 옆에는 세 개의 벤치가 길가를 따라 주저앉아 있다. 동윤은 화면을 등진 채 가로등 가장 가까운 벤치 위에 앉아 있는 한 남성의 실루엣에 천천히 다가간다.

 

한밤중의 공원

 이 장면은 윤성현 감독의 영화 『파수꾼』의 일부분으로, 한 중년 남성이 자신의 아들 기태가 자살한 이후 그의 죽음을 추적해 나가던 와중에 기태의 옛 친구인 동윤과 만나는 순간을 그리고 있다. 영화는 아주 친했던 세 친구(기태, 동윤, 희준) 사이의 관계가 조금씩 어긋나기 시작해 결국 파멸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보여주고 있는데, 파멸의 결과물인 ‘기태의 죽음’을 추적하는 아버지와, 파멸의 일부였던 동윤의 만남이 극 중에 등장하는 것은 어쩌면 이야기의 흐름 상 당연한 수순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당연해 보이는 이 장면이 특별한 이유는 단지 스토리상 적절한 장면이기 때문인 것만은 아니다. 핵심은 이 장면이 ‘앞서 나왔던 장면’이라는 데에 있다. 동윤이 기태의 아버지를 만난 장소는, 영화의 중반부에서 동윤과 기태가 만나 대화를 나누었던 장소와 같고, 심지어 인물의 걸음걸이와 그걸 따라가는 카메라의 동선, 그리고 저 멀리 보이는 인물의 실루엣의 모습마저 유사하게 표현된다.

 똑같은 장소이지만 관객은 모든 것이 변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절친했던 친구 관계는 완전히 어긋나 버렸고, 누군가는 죽음을 택했다. 남은 이들은 허탈한 마음에 그 죽음을 되새김질하며 하루하루를 고통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모든 것이 변했는데도 영화는 이를 표현하기 위한 특별한 장치를 사용하지 않으며, 심지어 배경음악의 삽입조차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절제된다. 쉽게 말하자면,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고 애쓰는 영화인 셈이다.

 이렇게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와중에 관객이 인지하는 플롯과 영화적 표현 사이의 괴리는 영화의 후반부로 갈수록 점점 더 커져만 가고, 일반적인 영화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관객이 느끼는 감정의 진폭을 키워 나간다. 이렇다 할 장치 없이도 관객의 감정을 동요시키고, 영화의 내용에 대해 고민하게 만들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여러 공간적 배경들에 부여된 장소성에 대한 탁월한 이해가 바탕이 되어 있다.

 인간사는 공간적 토대 위에서 이루어진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공간 속에 귀속된 존재로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러한 공간적 맥락 속에서 우리는 타인과 다투기도 하고, 사랑을 나누기도 하며, 말하자면 ‘삶의 모든 것’들을 행하면서 살아간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특정한 공간은 그 공간으로서의 의미가 아니라 각 개인에게는 ‘특별한 의미’를 지니게 되는데, 이때 비로소 ‘공간’은 ‘장소’로 탈바꿈한다. 장소성은, 말하자면 공간에 인간이 의미를 부여해서 가시적이고 물리적인 양태를 가진 공간을 실존의 영역으로 끌어올리는 개념인 셈이다. 공간은 비어있는 것이 아니다. 그 속에는 인간의 의도와 상상, 공간 자체의 특성, 그리고 이 각각으로부터 파생된 온갖 실체들로 채워져 있다.[1] 예를 들어, ‘집’이라는 장소를 떠올릴 때, 우리는 단순히 집을 ‘잠을 자고 밥을 먹을 수 있는 곳’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만약 집이 그런 장소의 의미밖에 없다면, 집은 찜질방도 될 수 있고, 호텔도 될 수 있다. 그러나 집이라는 장소에서 우리는 수많은 경험들을 하고, 다른 장소들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다양한 정서를 그 안에 쏟아내며 살아왔기에, 어떤 면에서는 초호화 호텔에서도 느낄 수 없는 편안함과 애착을 집에 대해 가지고 있다. 말하자면 우리에게 집은 ‘기억의 지층’, 내지는 ‘감정의 지층’인 것이다. 장소성은 그렇기에 이러한 장소가 갖는 특성 내지는 우리가 장소에 부여한 특별한 의미를 뜻한다고 할 수 있겠다.

 영화 내에서 보이는 장소성은 실제 삶에서의 장소성과 대개 똑같은 효과를 가져다 준다. 그것은 공간과 그 공간의 변화를 직접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영상매체의 특징이기도 하다. 다만 우리들의 삶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대부분의 장소성은 흔히 고착화되어 그 의미가 크게 바뀌는 경우가 흔치 않은 반면, 『파수꾼』에서는 일련의 사건들이 발생하면서 기존의 공간적 배경에 부여되어 있던 장소성이 계속해서 변화하고, 그것이 관객들의 마음을 계속해서 ‘불편하게’ 만든다는 점이 중요하다. 인물이 바뀌고, 사건도 변화하지만, 장소만큼은 그대로 유지되어 있는 아이러니한 상황 속에서 관객들은 부유하는 심리 상태를 겪고, 영화가 표현하고자 하는 인물들의 감정이 관객들에게까지 전염되는 것이다.

 세 친구가 함께 야구공을 가지고 놀던 기찻길은 어느새 외톨이가 되어버린 주인공 기태의 외로운 심정을 대변하며, 그리하여 과거의 ‘따듯함’을 향수처럼 느끼게 하는 장소로 바뀌어버린다. 자신의 마음 속 깊은 곳의 이야기를 꺼내어 놓고 서로의 우정을 확인하던 동윤의 집은, 어느새 완전히 어긋나버린 인간관계 속에서 어쩔 줄 몰라 하며 과거의 행복했던 추억을 꺼내어 놓고 스스로를 자책하며 눈물 흘리는 죄책감의 장소로 탈바꿈한다. 친구들과 즐겁게 놀던 장소인 학교는, 어느새 자신이 혼자임을 확인하는 장소로 변한다.

 모든 것이 변했지만, 오로지 ‘공간’만은 그대로 남아 관객들을 그 장소성의 변화로 옥죄는 것이다.

기찻길
동윤의 집

 그런 면에서, 이 영화는 잔인하고 폭력적이기까지 하다. 화가 나지만 동시에 슬프고, 결론이 난 것 같지만 여전히 미련이 남게 만든다. 변해버린 장소성을 보여주지만, 그것을 해석하고 받아들이는 모든 문제를 관객에게 떠넘기기 때문이다. 혹자는 결론이 없는 영화라며, 영화가 전달하고자 하는 바를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평하지만, 어쩌면 그러한 반응 자체가 영화의 구성이 매우 성공적으로 이루어졌음을 보여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스스로의 인간관계도 제대로 다룰 줄 모르는 우리들의 모습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서두에 언급했던 장면으로 돌아가서, 장소성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동윤과 기태 아버지의 만남을 풀이해 본다면, 어쩌면 영화 전체가 그 20초간의 짧은 순간 동윤이 떠올린 모든 사건들의 총합일지 모른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우리가 연인이나 친구와의 추억이 깃든 곳에 가면, 순간 그 장소를 촉매로 하여 그들과의 모든 추억들이 떠오르듯이 말이다.

 공간은 그대로이지만, 모든 것이 변해있다. 옛 친구의 죽음에 가려진 파멸로 치달은 인간관계는 영화 내내 서로에게 비밀로 남겨진 채 두 ‘파수꾼’들에 의해 어설프게 지켜진다. 영화는 그 차이를 전면에 내세우려 노력하기보다는 그 공간적 배경은 그대로 둔 채로 달라진 장소성을 은연중에 드러냄으로써 역설적으로 관객에게 있는 그대로의 변화를 체감하게 한다.

 우리네 삶의 공간은 좁다. 그 좁은 공간을 우리는 의미로 가득 채우고, 의미와 의미 사이의 간극에는 수많은 사건의 끈들이 얽힌 실타래처럼 뭉쳐져 있다. 

 영화는 이러한 장소성을 바탕으로 과거와 현재, 기억과 현실, 허상과 실재가 혼재하는 영역을 끈질기게 포착해 내면서 뒤틀리고 찢어져버린 인간사의 흔적들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그리고 그 틈바구니 속에서 아우성치는 고통은 끊임없이 관객들을 옥죄며 스스로의 삶을 되돌아보게 한다. 영화 속에서 동윤이 거울 속의 자신을 바라보며 괜한 한숨을 내쉬었듯 말이다.

 

 

[1] 에드워드 렐프, “장소와 장소상실”(1976), 김덕현, 김현주, 심승희 역, 논형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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