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글에서 제가 소개하고자 하는 게임은 [NOISE 1][1]이라는 게임입니다.
게임의 소개에 앞서, 저의 지식으로 당장 증명할 수 없는 심증을 짚는 것으로 글을 시작하고자 합니다. 즉, 우리가 무언가를 이해하는 과정에서 인식 그 자체는 언제나 일정 부분 결손되며, 그것을 메꾸는 것은 인간 자신의 본연적 상상력 -- 비슷한 무언가 -- 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인식이라는 것은 감각적인 결여를 의미할 수도 있고 또는 시간적 결여, 즉, 어떤 사건이 일어나는 전 과정을 지켜보지 못하는 경우일 수도 있겠습니다. 또 한 가지가 더해지는데, 바로 대상과 나 사이의 근원적인 차이, 즉 내가 너, 그, 그녀, 혹은 그것이 될 수 없다는 현실에서 비롯한 존재들 간의 근원적인 거리입니다. 나와 타자 사이의 공허는 마치 강력한 자석 두 개의 같은 극끼리 작용하는 반발력과 같아서, 그것을 극복하려 하면 할수록 더욱 큰 힘이 필요합니다.
정지된 그림들의 연속에서 캐릭터들의 움직임을 느끼고, 활자의 일부가 훼손되면 앞뒤 문맥으로 그 단어를 유추해 내고, 잔뜩 가리고 찌그러트린 ‘로봇이 아님을 증명하세요'의 문자를 읽어내고, 까마귀가 날자 배가 떨어진다고 느끼는 것은 인간 인식이 가진 한계 -- 그것이 외부에서 비롯한 것이든 신체 자체가 갖고 있는 물리적인 한계에서 비롯한 것이든 -- 를 인간의 인식 체계 내에서 소화해 내는 방식을 보여줍니다. 우둘투둘한 인식의 원시(raw) 데이터는 금세 안티앨리어싱 처리가 되어 인간 개개인에게 매끈하고 미끌미끌하고 삼키기 편한 무언가로 변모하는데, 저는 이걸 일종의 보간(interpolation)이라고 생각합니다.
한편, 이언 보고스트는 사물의 경험을 이해하는 방식으로 비유하기를 제시합니다. 그가 묘사하는 존재 간의 ‘물러나있는’ 모양새는 제가 같은 극끼리의 반발력이라고 표현한 것과 언뜻 비슷해보입니다. 보고스트는 책의 전반부에 인간 중심의 인식을 내려놓는 존재도학의 방법론 -- 소위 라투르 열거 -- 를 통해 존재 -- 그것이 개념이든, 물질이든, 그 무엇이든 간에 -- 의 양상 내지는 존재의 배열을 드러내는 데에 초점을 맞춥니다. 그는 독해를 어렵게 만드는 각종 수사학과 난해한 문장구조를 폭포수처럼 신나게 쏟아내다가 어느덧 비유하기에 이르러서는 주춤하는 듯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그도 그럴것이 그가 스스로 존재들 간의 질서를 잔뜩 헤집어 놓고 그것들을 평평한 바닥에 흐트려 놓은 탓에, 이제 우리는 우리가 바라보는 대상들을 어떤 식으로 이해할 것인지, 즉, ‘사물의 경험은 어떠한 것인지’ 생각할 기반을 잃어버렸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무언가 관조하기 위해선 발 디딜 땅은 필요한 법이지요. 비유하기는 이런 와중에 그가 타자를 이해하기 위해 제시하는 일종의 타협안입니다. 말인즉슨 인간이 타자의 경험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은 어려우나, 그와 비슷한 비유들을 계속해서 제시하면 사물의 경험이 어떠할지를 ‘추측’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뭔가 불완전하고 섭섭한 기분이 듭니다.
한편, <NOISE1>은 플레이어에게 두 가지의 간극을 제시합니다. 첫째는 감각의 결여에서 비롯한 (게임 속) 세계에 대한 불완전한 인식과 통제이고, 두 번째는 주인공이 플레이어가 아니라는 점에서 비롯하는 타자와의 소통 문제입니다. 두 간극은 개별적인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사실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타자의 존재가 결국 나의 세계에 대한 불완전한 통제를 지각하게 하는 중요한 장치가 되기 때문입니다. 장애물과 적을 피해 목적지까지 이동하는 여타의 게임들에서 보통 ‘나'는 주인공으로 행동하기 때문에 내 인식의 한계를 자각할 이유가 없습니다. 게임은 캐릭터가 클리어를 위해 필요한 감각들만을 제공해 주기 때문입니다. 반면 <NOISE1>의 경우 플레이어는 ‘나'이지만, 실제 게임에서 동작하는 존재는 내가 아닌 @라는 텍스트 기호입니다. 이 기호는 내가 신호를 하면 나를 전적으로 신뢰해 움직이지만, 내가 볼 수 있는 것들을 보지는 못합니다. 그를 잡으러 다니는 경비병들이 있는데, 제가 잘못된 신호를 보내면 @는 꼼짝없이 죽게 됩니다.
게임의 과정에서 저는 @가 되었다가, 동시에 @가 아니라는 사실을 자각하는 과정을 반복합니다. @는 끔찍한 생체 실험이 자행되는 어떤 공간에 있지만, 저는 그것을 활자와 기호들로 추상화된 맵으로만 접할 수 있을 뿐입니다. 내장이 터져 바닥에 흩뿌려진 시체도 저에겐 그저 빨간 기호들일 뿐입니다 (은근히 끔찍하긴 합니다). @와 제 경험은 같아질 수 없는 것이지요. 하지만 @는 제가 신호한 대로 움직이고, 그러다 보면 별안간 저는 @가 제 자신의 캐릭터인 것처럼 여기게 됩니다. 그런 @가 제가 인지한 것을 인지하지 못해서 (예컨대 등 뒤에 다가오는 적을 보지 못해서) 죽음에 이르거나 하면, 저는 @와 같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이 과정은 계속해서 반복됩니다. @는 저에게 끊임없이 말을 걸며, 자신이 얼마나 큰 위험에 처해있는지,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 계속해서 설명합니다. @의 말에 저는 ‘PING’ 등의 제한된 명령어로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비대칭적인 감각, 일방적인 소통... 별안간 저는 @가 그 세계 내에서 느끼는 것과 결여하는 것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이해하기 시작합니다. 말을 하지 못하는 답답함은 @가 제 말을 듣지 못하는 답답함만큼이나 답답하고, 보지 못하는 답답함은 꼭 보여주고 싶은 마음만큼 답답합니다. 이를 깨닫는 순간 제가 느끼는 감각들이 @가 느끼는 감각들의 정확히 반대 지점에서 형성되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는데, 그것은 제가 제 자신임과 동시에 음각된 @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마치 자석의 N극과 S극처럼요.
음각된 @는 @가 아닐까요? 물론 아니지만, @는 @만큼 @입니다. 나와 타자 사이의 경계는 역설적이게도 타자의 형태를 분명하게 합니다. 저는 빈 퍼즐 조각을 채우듯 저에게서 결여된 곳 -- 타자가 자리하는 그곳 -- 을 ‘보간’하고, @와 연결되는 기분을 느낍니다.
물러선 존재들을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그것들에 더 가까이 다가서야 할 필요가 없다는 점은 어쩌면 보고스트가 극복하지 못했던 문제의 실마리가 문제 그 자체에 있다는 점을 알려주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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