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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이비인후

by 고우 2019. 4.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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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물밀 듯 들어왔다, 각자 잰걸음으로 빠져나가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그는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았다. 사람이 나방도 된다. 그저 어디를 향해 가는 모습이 나방이다. 그럼 나방은 사람일까?

그는 그가 앉은 자리가 안전한지 확인하려는 듯이 바닥을 주먹으로 탁, 탁, 하고 내리쳐 보더니 이내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그곳에 누웠다. 나는 나방은 아니다. 누에고치? 그것 치곤 그는 너무 더럽고 냄새났다. 그의 코는 이미 그의 냄새에 익숙해진지 오래다. 그래서 그는 가끔 그의 냄새가 그립다. 그리운 그의 냄새, 이젠 너무 익숙해 잊어버렸다. 그가 누군가에게 다가가면, 그 누군가는 어찌됐든 내색하든 안하든 약간의 눈살 찌푸림을 보였는데, 그는 아마 그의 몸에서 나는 냄새일 것이라고, 거의 구십오 퍼센트 정도 확신하고 있다. 그러면 그는 그 누군가가 조금은 부럽다. 부럽다 못해 그의 코를 쥐어뜯어 그의 몸에 붙어있는 코와 맞바꾸고 싶다. 그러면 그 코는 이미 그의 냄새에 익숙해져 있으니 누군가는 더 이상 그의 냄새를 맡지 않아도 좋고, 그는 그의 냄새를 그리워했으니 이때 마음껏 맡으면, 서로서로 좋은 것 아닌가? 그러나 그는 그러지는 못했다.

뭐, 기회만 된다면 언제든지- 그의 생각이다.

지나가는 사람마다 눈살을 찌푸리는 것이기에, 그는 그가 마음만 먹는다면 언제든- 그것이 오늘 저녁이 되었든, 내일 저녁이 되었든, 어쨌든 그의 냄새가 도무지 그리워서 견딜 수 없을 만큼 고통스러울 때, 널린 것이 사람이니까, 그는 어찌 됐든 아무나 붙잡고 잠깐만 코를 빌려달라고 사정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순순히 주지 않는다면- 그는 그냥 그를 버리고 다른 사람을 붙잡으면 그만이다. 아니면 저기 매일같이 찾아오는- 가끔 그 몸뚱이는 바뀌지만 그 푸른 복장은 그대로인 저 사람, 저 사람한테 부탁하면 들어줄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는 아직까지 그의 냄새가 그렇게 사람을 붙잡고 구걸을 할 정도로 그립진 않다. 그런데 왜?

아저씨.

그는 분명 이 남자에게 코를 빌려달라고 부탁한 일이 없다.

아직까진 괜찮은데,

뭐가요?

안 빌려줘도 돼.

아니 무슨 소리에요?

아니, 코,

그는 도무지 이 남자가 자신에게 이렇게까지 선심을 베푸는 이유를 알지 못한다. 그는 이런 사람을 조심해야 한다. 예전에 한번- 자신에게 괜한 호의를 베풀어주는 이에게 호되게 당한 일이 있다. 그는 어찌 됐든 이 상황을 벗어나야 한다. 그렇지 않는다면-

코 필요 없다고!

아니 코가 뭘 얘기하는지는 모르겠는데, 아저씨 여기에 이렇게 앉아계시면 안돼요. 행인들 방해되잖아요.

뭐가?

아니 지나가는데 아저씨 같은 분이 이렇게 바닥에 앉아있으면 방해가 안 되겠어요?

됐고, 난 필요 없으니까 돌아가 봐.

뭐가 필요 없다는 거에요?

코!

아니 코가 뭔데요?

그는 조금 의아하다. 이 남자는 코가 뭔지도 모르고 자기를 돕겠다고 왔다. 수상하다. 누군가의 사주를 받은 것은 아닐까?

코가 뭔지 몰라?

네. 설마 이 코는 아니죠?

남자가 손가락으로 자신의 코를 가리킨다.

맞아, 그거.

그래서 그는 지금 더욱 불안하다. 그는 코가 뭔지 알고 있었다! 그것도 정확하게! 인중이나, 볼이나, 눈이나, 그 주변에 건드릴 곳이 많은데 한가운데 코를 정확히 짚었다! 그는 코를 안다! 그렇다면 그는 왜 코를 알았으면서 모른 척을 했을까?

아니, 이게 뭐가 필요 없어요? 아 됐고, 얼른 비켜요.

코가 필요 없지 않다?

그럼 그는 그에게 코를 빌려주는 척을 하면서 그의 코를 훔쳐가려던 것이었을까? 그럼 그는 앞으로 그의 냄새를 맡고 싶을 때 뭘 담보로 코를 빌려야 하는 것일까? 그의 코와 다른 사람의 코는 가격이 같으니 선뜻 빌려주겠지만, 손가락이나 발가락은 조금 애매하다. 그렇다고 그의 물건을 떼어 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어찌 됐든 오줌은 싸야겠으니-

그는 남자를 두려워하며 코에다가 얼른 손을 갖다 댄다. 눈 뜨고도 코 베어가는 세상이다. 조심해야 한다.

저리 가!

뭘 저리 가요! 아저씨가 일어나셔야지.

일어나라고?

네.

여긴 내 자리인걸? 이젠 자리까지 뺏으려 하나?

아니 대체 무슨 소리에요! 여기가 언제부터 아저씨 자리였어요!

지금 내가 앉아 있잖아.

앉아있다고 아저씨께 되는 건 아니잖아요! 자꾸 이상한 말 하면 경찰 부를 거에요!

대범하다. 남의 것을 빼앗으면서 경찰까지 불러보라고 한다. 경찰 따윈 두렵지 않다는 거다. 그는 얼른 얼굴에 손을 갖다 대고 코가 잘 붙어 있는지를 확인한다. 그리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출구 쪽으로 달아났다. 뒤쪽에서 욕지거리가 들려왔다. 그는 그를 놓친 것에 대해 짜증을 내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히 그는 그 위험한 인물로부터 잘 도주했다. 하마터면 그의 하나뿐인 코를 빼앗기고 다시는 그의 냄새를 맡지 못할 뻔 했다.

해는 벌써 저편 너머로 잠기고, 반대편 하늘에 검은 빛이 돌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는 오늘 밤을 보낼 곳을 찾아야 한다. 어젯밤엔 다리 밑에서 잤다. 그곳은 아늑해서 항상 누군가가 앉아있는데, 운이 좋았다. 마침 그 다리에만큼은 사람이 별로 없어서 자리가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두 번의 요행을 바라선 못쓴다. 그는 주위를 어슬렁거리다가 구석진 곳에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을 자세로 누웠다. 그곳도 다리만큼은 아니었지만 나름대로 아늑하고 조용한 구석이 있어 마음에 들었다. 이 정도라면 며칠 묵어도 될 것 같다.

그는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신문지가 하나 없는 세상이다. 몇 년 전만 해도 널린 것이 신문지였는데, 이젠 다들 손에 작은 기계 하나로 뉴스를 다 보는 모양이다. 그는 그의 시대가 조금씩 지고 있음에 서글퍼하며, 한쪽 손으로 코를 만지고, 다른 쪽 손으로 덮을 만한 것들을 찾아 더듬거렸다.

없다.

그럼 조금 곤란하다.

아니, 있다. 없는 줄 알았던 신문지 쪼가리 몇 개가 남아 있다. 됐다. 이거면 그는 행복하다. 그는 그곳에 엎드린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그를 의식하지 않는다.

내가 널 의식해주마- 큰 호의를 베풀어 그들을 유심히 바라봐준다.

그는 어제도 이런 식의 삶을 살았고, 오늘도 이런 식의 삶을 살고 있다. 내일은? 장담 못한다.

그는 하품을 늘어지게 하면서 저 사람들이 어디로 향할까 잠시 고민해본다. 그러나 그 고민이란 것도 사실은 할 일이 없는 그이기에, 그만이 할 수 있는 고민인 셈이다. 인간은 누구나 어딘가에 속해 있기 때문에, 아무 곳에도 속해 있지 않은 그에게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는 존재이다.

그는 코를 킁킁거려본다. 자동차 매연 냄새와 담배 냄새, 사람들의 땀 냄새가 조금씩 섞여있는 야릇한 냄새가 그의 코를 적신다. 그는 숨을 크게 내쉬었다가, 코로 다시 숨을 크게 들이쉰다.

찌들어 있다. 어딘가에 찌든 사람의 냄새다.

그러나 이번에도 그는 그 자신의 냄새는 맡을 수 없었다.

눈을 감는다.

뜬다.

그러면 아침이 된다.

그는 자리에서 다시 일어난다. 그의 아침은 하잘 것 없이 또다시 저 거리를 지나가는 사람들을 관찰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없다가, 조금 있다가, 조금 많이 있다가, 미어질 듯이 많다가, 다시 조금 줄면, 그는 다시 없어질 것을 알고 다시 자리에 드러누워 잠을 청한다.

눈을 감는다.

뜬다.

그러면 시간이 조금 지나있다. 그는 조금 배가 고프다. 킁킁거려본다. 가끔 가다가 향긋한 냄새가 날 때도 있긴 하지만, 대부분 매연 냄새다. 지하로 내려가면-

그는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어 본다.

일 년 전 쯤 옷이 너무 낡아서 구멍이 뚫린 주머니다. 그러니까 주머니이긴 하지만 너무 깊어서 손을 계속해서 집어넣으면 결국 땅이 닿는, 그런 구조다. 그래서 그는 돈을 모으는 일을 포기해버렸다.

돈은 왜 버는지 모른다.

과거에도 몰랐지만 지금도 모른다.

그때는 돈이 없으면 죽을 줄 알았다. 그러나 지금 그는 그 가난한 역사의 산 증인- 버젓이 살아 쓸데없이 자리에 앉아 죽을 것을 기다리고 있다.

죽음!

죽음이 아니면 자유를 달라!

그는 외친다.

그러면 기분은 좋다.

하지만 배는 여전히 고프니, 그는 먹잇감을 찾아 어슬렁거려야겠다.

지하로 내려가면 몇 군데 상가가 있다. 몇 개월 전만 해도 이곳의 상점들은 꽤나 많았다. 그런데 이젠 없고, 번쩍거리고 화려하게 바뀌어버렸다.

-돈?

그는 좀 더 걷는다. 그러면 뭐라고 적혀 있는지 알 수 없는 간판 밑에 음식들을 판다. 가게 문 옆에 난 창문으로 사람들이 무언갈 먹는 모습이 보인다.

그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간다. 사람들이 그를 바라보는 것을, 그는 느낀다. 그는 그의 옆에 놓여 있는 밥솥을 열고 그 안에 손을 집어넣는다.

갑자기 누군가가 소리를 지른다.

앞치마를 두른 여자 하나가 다가와 그에게 다짜고짜 손찌검을 한다.

왜 때리나?

나가 이 거지새끼야!

그는 여자의 찌푸린 눈살을 본다. 그리고 눈을 살짝 아래로 낮춰 그녀의 벌렁거리는 콧구멍을 본다. 저 콧구멍은 지금 그의 냄새를 맡고 있을까? 아무튼 그는 갑자기 이 여자가 그를 때리는 상황을 이해할 수 없다.

그는 손에 한 움큼 쥐여 있는 밥을 입에 집어넣고 황급히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맛있다.

안에선 여전히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미안해요- 죄송합니다- 하는 소리도 들렸다. 그는 그 말을 자신에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맞은 것은 그였는데, 왜 사과는 다른 사람들이 받는지 그는 알 수 없었다. 요즘엔 사과도 대신 받아주는 사람이 있군, 그는 생각한다. 그가 어릴 적에는 그의 부모가 제가 대신 사과 드릴게요- 하는 얘기밖엔 들은 적이 없다. 사과를 대신 할 수도 있는 것을 그는 그때 처음 알았다. 이젠 시대가 변해 사과를 대신 받는 것도 가능해졌다는 것을 그는 깨닫는다.

그는 다시 문을 열고 들어가 환하게 웃으며 말한다.

저는 괜찮습니다. 제 대신 사과를 받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여자가 뒤돌아서서 그를 노려본다. 다시 소리를 지르며 그에게 발걸음을 옮기려던 찰나- 그는 밖으로 나가 그가 원래 있던 곳을 향했다. 상대방이 사과를 하면 용서해줄 줄도 알아야 한다. 그는 그렇게 배웠다. 비록 사과는 그 대신 다른 이들이 받았긴 했지만, 용서는 그가 해야 마땅한 일이었으므로- 그는 조금은 뿌듯하다.

밥알이 묻어있는 손은 조금 끈적거린다. 그는 좀 더 걸어 구석진 곳에 자리 잡고 있는 화장실로 향한다. 화장실엔 거울이 있다. 그는 손을 씻다 말고 거울 속의 그 자신을 바라본다. 밥알이 입 주변 이곳저곳에 붙어 있다. 그리고 그 위의 코- 그것은 여전히 안전하게 그의 얼굴에 붙어 있다. 그는 손을 뻗어 그 거울 위에 맺힌 코의 상을 어루만진다.

그는 손을 씻는다. 이참에 세수도 한다. 물이 너무 깨끗해서 어색하다. 간만에 얼굴을 씻으니 기분이 상쾌해진다.

그는 걸어 나온다. 오른쪽으로 갈지, 왼쪽으로 갈지 그는 결정해야 한다.

그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걸어왔으니까, 그 흐름을 유지하기로 한다. 계속해서 걷는다. 걷다 보면, 아까 그가 내려왔던 계단과 비슷하게 생긴 계단이 또다시 나온다. 나왔으므로 올라간다. 더 고민할 것은 없다. 해는 이미 하늘의 한 가운데에 떠서 작렬하고 있다. 그는 눈이 잠깐 부시다.

햇볕이 없는 곳을 찾아야겠다.

지하?

그럼 그는 다시 내려가야 하지만, 그것은 왠지 오늘은 내키질 않는다. 그는 좀 더 걸어 골목길 사이사이로 가봐야겠다고 생각한다.

길거리를 지나가는 사람들이 그의 얼굴을 바라본다.

아까 너무 깨끗이 씻는 바람에 사람들이 그를 알아본다고, 그는 생각한다.

괜히 씻었나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그는 괜스레 기분이 좋다.

세상은 나를 아직 잊지 않았다- 그는 생각한다.

그는 길바닥에 앉아 그 즐거움을 좀 더 만끽하기로 한다. 사람들이 눈살을 찌푸린다. 틀림없이 그들은 그가 맡지 못하는 냄새를 맡는 것일 게다.

주위를 둘러보면, 그곳 너머에는 버스가 참 많이도 온다. 사람들은 참 많이도 몰려와서 어디로든 가는데, 그들이 어디로든 가는 것인지, 어디든지 그들에게 오는 것인지 그는 참 헷갈린다.

그런데 갑자기 짤랑, 하는 소리가 그의 몸을 따갑게 때린다. 그는 조금 놀라 주위를 둘러본다. 무엇도 없다. 그러나 그곳엔 그림자가 져 있다. 고개를 들자 한 남자가 그를 지긋이 바라보고 있다.

아저씨.

그는 그 남자를 바라본다. 그는 청바지에 약간 밝은 회색빛의 티셔츠를 입고 있다. 그는 조금 놀란다. 이 사람은 또 왜 나에게 다가왔나?

누구?

누구냐는 질문에 남자는 조금 당황한 빛을 보이더니 이내 하, 하, 하며 조금 웃고선,

저는 그냥 행인인데요, 한다.

행인?

네.

그는 남자를 바라본다. 조금 떨리는 눈동자를 가지고 있지만, 입가에는 약간의 미소를 띠고 있다. 그리고 그 가운데 콧구멍, 잘 붙어 있다.

너도 나에게 코를 빼앗으려 온 건 아니지?

남자의 눈이 동그래졌다가,

코요? 한다.

그래, 코.

아뇨, 코가 아니라, 아저씨한테 선물 드리려고 왔어요.

남자는 주머니에서 천 원짜리 지폐 몇 장을 꺼내 그의 손에 쥐어준다.

아저씨, 이걸로 밥도 좀 사 드시고 하세요.

찰칵- 하는 소리가 그의 오른쪽에서 들린다. 그는 고개를 돌려 사진을 찍은 사람을 바라본다. 아하, 저걸로 신문만 보는 것이 아니라 사진도 찍는구나, 한다.

그는 다시 고개를 돌려 자신을 향해 웃고 있는 남자를 바라본다. 그에 비하면 한참 젊다.

너는 왜 나에게 이걸 주는 거지? 난 이걸 쓰지 않아.

아뇨, 괜찮으니 쓰셔도 돼요.

남자는 씩- 하고 웃는다.

그는 또 다시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직면했다.

이 남자는 나에게 돈을 주고 웃고 있다, 미쳤나?-

웃고 있다는 것은 필시 무언가를 얻을 것이라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는 남자가 무엇을 얻는지에 대해 고민해본다. 그가 알기로 사람들이 가장 소중히 생각하는 것은 바로 이 돈이라는 것인데, 자신이 가장 소중히 생각하는 것을 그냥 내어주고도 저렇게 웃는 자가 있단 말인가.

그가 남자에게 묻는다.

나는 너에게 뭘 줘야 하지?

남자는 잠깐 눈이 동그래지더니, 이내,

아무것도 주지 않으셔도 돼요, 선물이니까요, 하고선 싱긋 웃어보이고는 그의 곁을 떠난다.

이상한 일이다. 남자는 자신의 손에 있는 지폐를 잠시 바라보더니, 손을 들어 그의 코를 만진다. 다행히 붙어 있다. 그럼 저 남자는 그에게서 정녕 아무것도 받지 않았단 말인가?

그는 이해할 수 없다. 그래서 누워버렸다.

눈을 감았다가,

뜨면,

해질녘이 되어 있다.

그의 손에는 아직 지폐가 들려 있다. 이것이 돈이라는 것이다. 그는 도대체 이 종이에 무슨 의미가 담겨 있는지를 알 수 없었다. 사람이 그려져 있고, 푸른빛이 돈다. 조금 예쁜 것 같기도 하지만, 왠지 늙어보이는 사람의 얼굴은 오늘날의 모습과는 거리가 있다. 그는 이리저리 지폐를 돌려보다가, 한쪽 구석에 숨겨진 얼굴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경악을 금치 못한다.

사람이다!

그림을 그려놓긴 했는데, 누군가가 보지 못하도록 감춘 그림이다. 그런데도 이걸 보려고 마음만 먹으면 보도록 만들어 놓았다. 보라는 뜻인가? 아니면 봐선 안 된다는 뜻인가? 어지럽다. 그는 돈을 이리저리 더 보다가, 이내 다시 눈을 감는다. 다시 뜬다.

이번엔 눈을 떴다고 해서 다음날이 되어 있진 않았다. 그는 배가 고프다. 자리에서 일어난다. 무언갈 먹어야겠다.

그는 손에 들린 지폐를 바라보고, 이걸 한번 써봐야겠다는 다짐을 한다.

그는 일어난다. 그리고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지하로 내려간다. 아까의 그 가게에 갈 심산이다. 사람들이 그를 힐끗거리며 쳐다본다. 오늘따라 사람들이 그에게 많은 관심을 갖는다는 생각을 하자, 그는 진정 씻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새삼 깨닫는다. 씻는 것은, 다른 이들이 그를 바라볼 수 있게 하는 것인가-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단지 얼굴과 손을 씻었을 뿐인데 이렇게 바라보는 것도 이상하다. 그가 알기로 사람들은 거의 매일 씻는다. 그럼 그들은 서로의 얼굴을 미친 듯이 치어다 보아야 할 것 아닌가?

코.

그는 그의 코를 만진다. 그가 그의 냄새를 맡지 못하듯이,

그들의 눈도?-

묘하다.

그는 더욱 천천히 걸으며 그를 힐끗거리며 바라보는 이들의 눈을 한번 바라본다. 알 수 없다.

그는 아무튼 가게의 문을 연다. 그래도 한 번 와 봤다고, 익숙하다.

어서오세-,

하다가 여자가 그를 알아차리고 표정을 굳힌다. 그녀가 소리를 지른다.

여보, 거지새끼 또 왔어!

갑자기 가게 안쪽에서 우당탕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거대한 몸집의 남자가 그에게 다짜고짜 다가온다. 짝, 소리가 나면-

아득하다.

그는 휘청인다. 그의 코를 만진다. 아직 붙어 있다.

그는 머리를 감싼다. 그러나 의외로 이번엔 퍽, 하는 소리가 난다. 이번 건 더 아프다.

그는 윽, 소리를 내더니 가게 문 쪽으로 뒷걸음질 쳤다.

이 씨발놈!

그는 황급히 주머니에서 돈을 꺼낸다.

잠깐만, 잠깐만!

하는데 그는 뒤로 쓰러지고, 손에 있던 돈을 떨군다.

그는 기다시피 일어나 가게 문을 열고, 열다가 돈을 챙기고, 그리고 밖으로 나간다.

남자가 그를 따라 나온다.

이 씨발 거지새끼!

퍽 소리가 한번 더 들리면 아프다.

그는 그 와중에 코를 잡는다. 이것만은-

그는 소리친다.

돈 줄게!

남자가 잠깐 멈칫, 한다.

뭐?

이 돈 준다고! 이거 주려고 왔어!

남자는 멈칫, 한다.

뭐?

돈 준다고.

그의 정신은 점점 또렷해진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그는 주위를 둘러본다. 사람들이 그 물건을 들고 서 있다. 신문도 보는데 사진도 찍는 그것, 어쩌면 그들은 새로운 뉴스를 만드는 것인지도 모른다.

남자가 멍한 표정으로 그를 내려다본다. 그는 조심히 코를 잡고 일어선다.

코는 안 돼. 코는. 난 코가 필요해. 그러니 이 돈을 가져가. 나에겐 이게 필요 없어. 이게 너희들한테는 가장 소중한 거잖아.

남자가 얼떨결에 푸른색 종이다발을 받아들자, 그는 비틀거리며 남자에게서 멀어졌다.

사람들이 엉거주춤, 하더니 조심스레 그가 가는 길의 옆으로 비켜선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멈추지 않는다. 뭘 봐!, 그의 뒤에서 남자가 소리친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일순간 사라진다.

그는 개의치 않는다. 갈비뼈를 만진다.

아프다.

오늘은 더 이상 무언가를 먹을 수는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어쩌면 그는-

내일 눈을 뜰 수 있을까?

그는 좀 더 걷다 어두운 구석에 가 자리를 잡는다.

아프다.

눈을 감는다.

그는 돈에 대해 생각한다.

생각하려는데, 머리가 아득하다.

아프다.

그는 그의 코를 잡는다.

그러자 새까맣던 주변에 밝은 빛이 차오르면서 뿌옇게 번지기 시작한다. 그는 일종의 두려움을 느낀다. 눈을 질끈, 했다가,

정신이 드세요?, 하는 소리에 눈을 뜬다. 눈이 부시다. 그는 눈을 찡그렸다가, 그를 에워싸고 있는 사람들을 발견하고 몸을 일으키려 한다. 목소리의 주인공이 그의 몸을 제지한다.

누워 계세요. 많이 다치셨어요.

여자에게선 향긋한 냄새가 났다. 그는 그의 코를 잡는다. 아직 있다.

일어나야 해.

그가 여자에게 말하자, 여자는 잠시 망설이더니 허리를 굽혔다. 그러자 갑자기 그를 받치고 있던 바닥이 들리면서 그도 동시에 앉은자세로 바뀌었다.

그는 깜짝 놀라 땅을 짚는다. 그런데 땅이 아니라 무언가 포근한 것이 푹신하기까지 하다.

그렇다면 이것은 그의 사라진 기억들 중에 묻혀있는, 그래 필시 침대-라는 것일 게다.

그는 몇 번 더 푹신함을 시험해보려 손으로 침대를 푹, 푹, 눌러보더니 이내 고개를 들어 정면을 응시한다.

이때 그는 조금 당황하는데,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찰칵- 하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린다. 번쩍번쩍 하는 불빛에 그는 눈을 가리고, 얼굴을 찡그리며 신음소리를 냈다.

여러분 사진 촬영은 자제해주세요!

그의 왼쪽 편에 서 그를 바라보던 남자가 작고 크게 외친다.

그는 잠시 머리가 멍하다.

상황을 이해하는 데 시간이 걸릴 것 같다- 눈을 감았다가 떴는데, 누웠던 곳이 아니라 다른 곳이고, 사람들이 그를 바라보고 사진을 찍는다.

저들은 누구지?

그가 여자에게 묻는다.

저, 하고 여자가 잠시 망설이더니,

기자들이에요, 하고 한숨을 내쉰다.

아하, 그러니까 그는 눈을 감았다가 떴는데, 갑자기 그는 침대 위에 누워있었고, 향기로운 여자가 옆에 서 있고, 기자라는 사람들이 그를 바라보는 형국?

우습다.

그는 왠지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세수 한 번 했다고 다들 나한테 이러는 꼴이라니, 하며 침대에서 내려가려 몸을 움직인다. 어째서인지 아프기만 하고 움직이질 않는다.

안정을 취하셔야 해요. 몸 상태가 말이 아니에요. 누워서 쉬세요.

여자가 다시 허리를 굽힌다. 그러자 기자들이 점차 땅으로 꺼지고, 그의 눈에는 하얀 천장만 비춰진다.

눈을 감는다.

-

다시 뜬다.

익숙한 편안함. 그의 몸이 점점 떠오른다. 기자들이 잠들어있다. 그는 조심스럽게 그들 위로 날아가 그들의 눈을 바라본다. 눈은 감겨있지만, 눈꺼풀 아래에 감춰진 그들의 눈은 그를 바라보고 있다. 그는 가까이 다가가 그들의 냄새를 맡는다. 익숙한 냄새- 그것은 그의 냄새였던가? 그는 몸을 좀 더 높게 띄운다. 그의 몸이 천장을 뚫고 올라간다. 위를 올려다보자 구름 뒤의 별들이 밝게 빛나고 있었다. 그는 더 높게 올라간다. 속도를 낸다. 아래를 내려다보자 도시의 불빛이 밤하늘을 밝히고 있었다. 점점 멀어지며, 그는 그를 비추던 밝은 별빛 중 하나에게 가까이 다가간다. 눈을 감는다. 그것의 냄새를 맡는다. 뜨거운 냄새. 묘하다.

그의 안에 있던 무언가가 끓는다. 눈을 뜨자 별빛 안에 감추어져 있던 그의 발가벗은 몸이 드러난다. 무언가를 숨기는 것을 어둠이 아니라 빛으로도 한다는 것은 묘한 일이다.

그는 그의 몸에 다가가 그를 자세히 바라본다. 코를 가까이 대 본다. 희미하다. 그는 되돌아나와 그의 몸이 있던 별을 등지고 주위를 둘러본다. 모든 곳에 별이 있었다.

갑자기 강한 중력이 그를 끌어당긴다. 그는 그것마저 편안히 받아들인다. 별들이 점점 멀어지고, 구름이 보이고, 그러면 다시 보이는 도시의 불빛, 그는 머리를 땅으로 향하고 도시가 가까워지는 속도를 즐긴다.

바람이 그의 귀를 스치고, 눈을 스치고, 마침내 코를 뚫으면,

그는 눈을 뜬다.

 

몸은 좀 어떠세요?

향긋한 여자가 그에게 묻는다.

그는 대답하지 않고 몸을 일으켜 세운다. 이번엔 여자가 제지하지 않는다. 몸이 한결 가볍다.

침대 앞쪽엔 커튼이 쳐져 있었다.

커튼을 젖히자 앉아있던 기자들이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본다. 눈이 충혈되어 있다.

당신들은 왜 나를 바라보는 겁니까.

그가 묻는다.

몸 상태는 좀 어떠신가요?

갑자기 여자가 그의 뒤에서 그를 잡아당긴다. 잠시만,

뭐지?

저 사람들 기자에요.

그건 네가 어제 나한테 말한 거잖아.

그래요, 그런데,

갑자기 남자 하나가 커튼을 젖히고 그에게 다가온다. 그는 흰 가운을 입고 있다.

저...선생님, 잠시 이쪽으로,

남자는 그의 팔을 끌어당겼다. 그는 남자가 끌어당기는 쪽으로 걸어갔다. 커튼 밖으로 나서자 기자들이 벌떡 일어서 사진기를 찍어댄다.

현재 심경은 어떠-,

몸은 어떠-,

식당 주인에게 하실-,

하는 소리가 그의 귀를 가득 메운다.

그를 끌고 가는 남자가 소리친다.

나중에, 질문은 나중에 하십시오!

어지럽다. 그는 우뚝, 하고 멈춰선다.

이게 뭐지?

남자에게 묻는다.

남자는 잠시 당황하더니,

저기, 저기 안에 들어가셔서, 일단 다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한다.

그는 움직이지 않는다.

제발, 남자가 말한다.

그는 못이기는 척 안으로 걸어 들어간다. 그의 뒤에서 정숙해주세요!, 하는 소리가 들린다.

문을 닫자 조금은 조용해진다.

책상 하나, 그 위에 컴퓨터가 놓여 있고, 여기저기에 종이쪼가리들이 널려있다. 벽에는 사람의 몸이 잘려 있는 그림이 붙어 있다. 그는 조금 의아하다.

이곳이 병원이오?

저, 선생님.

남자가 한숨을 내쉰다.

저는 이곳 의사입니다. 아시다시피 이곳은 병원이구요,

그는 남자의 옷을 바라본다. 흰색 가운이지만 이곳저곳에 얼룩이 져 있다.

기억하시겠지만, 일주일쯤 전에 식당 주인한테 두들겨 맞으셨죠?

그는 그의 갈비뼈를 만져 본다. 일주일이 어느새 지나있다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다. 그가 모르는 사이 그는 눈을 몇 번 감았다 떴던가.

고개를 끄덕이자, 의사가 말을 이어간다.

뭐, 다친 곳은 이제 말끔히 나으셨지만, 그게, 사람들이 사진을 찍어서 여기저기에 올리는 바람에, 일이 좀 커졌습니다. 일단 저, 그, 선생님을 때린 사람은 지금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고 있구요, 여론이 좀 있어서 대충 끝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뭐 일단은 그렇게 되긴 했는데-

의사는 안경을 고쳐 쓰더니 그의 눈을 바라본다.

저, 그 돈 있잖습니까? 그날 오전에 그 집에서 밥을 훔쳐 드셨죠? 그걸 갚으려고 되돌아갔다고 하던데요.

-그랬나?

네, 그게 중요한 건 아니고, 그런데 이 돈을 또 다른 남자한테 받으셨더라구요? 근데, 어, 참, 그 사진을 누가 또 찍었더라구요. 하, 그러니까 지금 상황이 되게 묘한 것이 된 겁니다. 선생님한테 어떤 남자가 준 돈을, 그가 과거에 저질렀던 악행을 반성하고자 사용한, 그런 모습이 된 겁니다. 결과적으로-

의사는 안경을 고쳐 쓴다.

결과적으로, 동정여론이 일었어요. 그리고 아저씨가 두들겨 맞는 영상이 퍼지면서 돕겠다는 사람들이 나타나고, 그, 돈을 모았다는 말이에요. 아저씨를 위해서.

이해할 수 없군, 난 돈이 필요 없어.

그는 코를 만진다. 붙어있다.

내게 필요한 건 이미 있어.

의사가 그를 바라본다.

어, 그러니까, 그런데 그 돈이라는 것이, 그 일부가, 저희 병원으로 오게 됐습니다. 선생님 같은 가난한 사람들의 치료를 무상으로 지원할 수 있도록- 그러니까, 저기 기자들한테, 감사하다고 한마디만 해 주시면, 모든 것이 순조롭게,

기자들한테?

네. 감사하다고.

뭐가 감사한데?

그, 돈, 있잖습니까.

돈?

- 머리가 복잡하다.

난 돈이 필요 없는걸?

아, 그러니까, 그래도 그냥 예의상-,

예의, 라는 말은 새삼 생경하다.

나가고 싶어.

네, 나갈 수 있습니다. 저기, 저, 기자회견 하시면, 바로 보내드리겠습니다.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거야?

어, 저, 꼭 그런 건 아니지만, 좀, 문제가 생길 수 있으니까요,

무슨?

-남자는 한숨을 내쉰다. 눈 밑이 부르르, 하고 떤다.

그저 고맙다고, 그 한마디만 하고 가시면 됩니다.

나가고 싶어.

그는 눈알을 돌린다. 이곳저곳이 하얗다. 그는 인체해부도-라고 적힌 아까의 사람 잘린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본다.

선생님,

남자의 목소리가 떨린다.

그가 남자를 바라보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밖으로 걸어 나간다. 어쩐 일인지 남자가 그를 붙잡지는 않았다.

문을 열자마자 플래시 터지는 소리가 그를 에워싼다. 그는 어지러움을 느낀다. 문 밖에는 향긋한 여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저, 이쪽으로,

그는 입구를 찾는다. 사람들에 둘러싸여 그는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눈을 감고, 여자가 이끄는 대로 따라간다.

숨을 깊게 들이쉰다. 땀 냄새, 술 냄새가 섞인 냄새가 그의 코를 적신다.

눈꺼풀 너머로 하얀 불빛이 들어온다. 그는 눈을 질끈 감는다. 아무것도 이해가 되질 않는다. 어지럽다.

냄새.

냄새.

그는 코를 벌리고 냄새를 맡는다.

정신을 차리면 그는 의자 위에 앉아있다.

그의 앞에는 기자들이 잔뜩 몰려있고, 웅성거리는 소리가 이곳저곳에서 울려 퍼진다.

냄새.

그는 자신의 코를 부여잡는다.

모든 것이 점차 또렷해진다. 그의 옆에는 어느 샌가 의자가 와서 의사 밑에 앉아있다.

글자 하나 차이는 이리도 크다-

또렷해지면서, 모든 것이 멀어져 간다.

저, 질문은 한 번에 하나씩만 받도록 하겠습니다.

남자가 말하자 여기저기서 손을 번쩍 든다.

맨 뒤쪽부터-, 하자,

맨 뒤쪽에 있는 남자가 큰 소리로 말한다, 환자분의 몸 상태는-

상처는 크지 않았-, 기본적인 몸 상태가 좋지 않아 회복이 더딜 것으로-, 예상보다 빨리 회복-

그러자 그 앞쪽의 여자가 묻는다.

환자분께 직접-, 환자분 현재 심경은-,

의사가 그의 환자를 바라본다. 환자는 잠시 멍하다가, 의사를 바라보다가, 남자의 부탁을 기억해 내고선 자리에서 일어나,

감사합니다, 한다.

어지럽다. 그는 의자를 뒤로 밀쳐내고 문 쪽으로 향한다. 이미 들어올 때부터 그는 나갈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비틀거리다가, 눈을 감는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이상하게 정신은 또렷하다.

눈을 뜨면 여전히 이곳은 현실- 별은 어디 갔나?

그는 발걸음을, 멈추고, 뒤돌아서서, 그의 의자가 기다리는 곳으로 걸어가 다시 앉는다.

내가 필요한 것은 돈이 아닙니다.

동그란 눈빛들, 그것은 돈에 손을 쥐어주었던 그 남자의 동그란 눈빛과는 사뭇 다르다.

내가 필요한 것은 코입니다. 전 그것을 이미 가지고 있으니, 더 이상 절 도와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당신들은 돈을 가장 소중히 여기지만, 저는 코를 가장 소중히 여깁니다. 당신들은 제게 돈을 주면서 당신들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을 잃었고, 저는 그것 때문에 제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제 코를 잃을 뻔 했습니다. 당신들의 도움은 서로를 더 불행하게 만들 뿐입니다.

그는 그의 코를 조심스레 만진다.

장내는 조용,

한데, 갑자기 한 여자가 손을 든다.

코가 뭐죠?

그는 그의 손가락으로 그의 코를 짚는다.

그게 중요한 이유는 뭡니까?

그는 잠시 입을 다물다가, 조심스레 연다.

코는 냄새를 맡을 수 있습니다. 별은 구름 뒤에 있지만, 구름은 별이 있다는 것을 절대 감출 수 없습니다. 저는 별을 보았습니다. 별도 냄새를 가지고 있죠. 가까이 가야만 맡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가까이 가는 것은 전 두렵지 않습니다. 두려워하는 것은 제가 아니라 당신들 아닙니까.

다시 조용하다, 그는 다시 입을 연다.

그 남자는 제게 돈을 줬습니다. 전 돈의 냄새를 맡아보았습니다. 불행히도 그곳에선 아무런 냄새도 맡을 수 없었습니다. 전 돈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돈은, 여러분의 것으로 남겨 두십시오.

그는 다시 몸을 돌려 문 밖으로 향했다.

그가 나가려 할 때, 흥분한 기자들이 그를 불렀고, 모든 것은 또렷했다.

아무도 없는 곳으로 가야 한다.

그는 달렸다.

병원의 하얀 복도와 하얀 불빛- 그 사이의 언뜻언뜻한 초록 빛깔-나무와 같은, 그를 바라보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어느 샌가 그를 쫓아오는 사람들의 발소리가 들린다.

쉭- 하는 소리가 그의 귓전을 때린다.

그는 언젠가 이런 경험을 했다고 생각한다. 기억나질 않는다.

그리고 그때는, 문 밖으로 나가면-

오른쪽, 오른쪽, 왼쪽, 왼쪽, 오른쪽, 그 옆을 바라보면- 푸른 들판, 그러나 지금은 빌딩 한 채가 눈에 보인다.

그는 그 안으로 들어간다.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다. 알맞다.

그는 계단을 타고 내려간다. 이곳 어딘가에 아늑한 공간이 있을 것만 같다. 그는 맨 마지막 계단을 내려온 뒤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계단 밑으로 조그만 공간이 있었다. 그는 그곳에 들어가 몸을 웅크린다. 그의 몸 하나가 들어가기에 딱 알맞은 크기였다. 따뜻하다.

그는 조용히 미소를 짓고, 눈을 감는다.

다시 눈을 뜨면, 그곳은 여전히 어둡다.

그러나 바깥도 어두울지는 예측할 수 없다. 그에게 시간은 하등의 의미가 없는 것- 그러나 아침과 저녁은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밖으로 걸어 나온다.

아침? 밤?

어둡다. 그러나 그는 직감으로 그것이 이른 새벽임을 알아차린다.

공기에 떠다니는 약간의 쌀쌀한 냄새- 그것은 인간으로부턴 나올 수 없는 향이다. 모두가 잠들고, 비로소 한두 명씩 깨어날 때쯤, 그러니까 인간의 향이 가장 많이 희석되었을 때쯤에 나는 냄새인 셈이다.

그것은 인간이 어쩌질 못하는 대지의 냄새다.

그는 건물 밖으로 걸어 나와 숨을 깊게 들이쉰다. 병원의 냄새는 그를 어지럽게 했었다.

이제 그는 다시금 자유를 되찾았으므로 그가 오늘 할 일을 정하고자 했다. 그는 밥을 먹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나 지금 거리엔 아무도 없고, 이른 새벽부터 문을 여는 가게는 없으니, 그는 일단은 좀 더 걷기로 한다.

우릉, 하는 소리가 갑자기 들린다.

그는 고개를 돌리고 버스를 바라본다.

그와 같이 이른 아침 눈을 뜬 영혼들이 있다. 그는 냄새를 맡으려 했지만, 너무 멀어 그 냄새를 맡을 수는 없었다.

갑자기 그는 추위를 느꼈다.

겨울이 다가오고 있다.

그는 버스가 지났던 길 쪽으로 방향을 튼다. 저 멀리에는 도시의 아침이 보인다. 해가 떠오르고 있다.

그는 잠시 그 자리에 주저앉는다. 길 한가운데에 이렇게 당당히 앉아본 것은 또 오랜만이다.

해가 떠오른다.

그러나 떠오른다고 생각했지만 떠오르진 않았다.

빌딩 숲 사이로 새어나오는 약간의 붉은 빛, 그 위를 수성물감이 흰 파레트 위에 번지듯, 조금씩 퍼져나가는 불빛은, 그 자리를 바로 직전에 차지하고 있던 회색빛을 무색하게 할 정도로 선명하다.

나가라!

태양이 붉게 외친다.

그러면 밤을 적시고 있던 달빛의 짙푸른 신음소리와 대지를 무겁게 내려앉던 간밤의 어두운 별빛이 슬그머니 꽁무니를 뺀다.

내가 돌아왔도다!

태양이 외친다. 그 광경을 넋 놓고 바라보고 있으면, 어느 샌가 이쪽 하늘은 파란 빛으로 물들어 있다.

붉은색과 푸른색, 그 경계는 모호하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난다. 태양을 향해 정면으로 걷는다. 어디로 가나-?

그는 알 수 없었지만, 일단 걷기로 한다.

걷다 보면 나무도 나오고, 보도블럭 틈 사이의 풀도 나오고, 자그마한 개미들의 행렬도 나온다. 그리고 가게도 나온다.

그는 가게에 들어가기로 한다. 저번처럼 물건 하날 집어가면 된다. 그는 가게 밖에 진열된 것 중에 먹을 것이 없나 살펴본다.

이런 아침에 이런 가게의 문이 열려있다는 것을, 그는 매일 보면서도 경이롭다 여긴다. 그러나 문은 열어 무얼 하나?, 차라리 그 시간에 나와 태양의 용솟음을 보는 일이 훨씬 낫지 않은가, 그는 생각한다.

아니, 어쩌면, 그것은 그에게만 해당되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면 그는 힘이 빠진다. 아하, 그러면 그는 여태껏 누구도 보지 못한 것을 보면서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도 보지 않는 것을 보면서 기뻐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코는-?

그는 먹을 것을 찾아본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먹을 것은 없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가게 안으로 발을 내딛는다. 안에 사람이 있을 것- 그는 혹시 그 사람을 방해하지는 않을까 걱정한다. 다행히 인기척이 없다. 그러면 그는 조심히 먹을 것 하나만 집어 나가면 된다. 그는 조금씩 깊숙하게, 안쪽으로 들어간다. 과자봉지가 여기저기에 눈에 띄었다. 그는 그 중에서 제일 작은 봉지 두 개를 집는다. 아침식사는 이렇게 해결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는 마음이 뿌듯해져 기쁜 발걸음으로 뒤돌아서서,

그를 바라보고 있던 남자 하나를 바라본다.

아뿔싸.

그런데 이상하다, 이 남자가 그를 보며 미소를 짓는다.

그는 어색하게 남자를 따라 미소를 짓는다.

혹시 제가 방해가 되었나요?

그가 묻자 다짜고짜 손을 내밀며 남자가 말한다.

한번 만나 뵙고 싶었습니다.

그는 남자를 바라보며 어쩔 줄 몰라 하다가, 내민 손을 붙잡는다.

무슨?,

선생님을 보고, 많은 것을 느꼈습니다.

그는 다시금 어지럽다.

대체 이 남자는 어디서 무얼 봤단 말인가. 그는 그의 기억을 반추해 보지만 그 남자를 기억해내지 못했다. 그가 최근에 기억하는 남자는, 기껏 해야 네댓 명 뿐, 그러나 이 남자는 도대체 어떻게 그를 알게 되었으며, 그를 알면 아는 거지 만나 뵙고 싶었다는 것은 또 무슨 극한의 존경이 담긴 언어란 말인가, 그는 일순간 온몸에 소름을 느끼며,

저를 아십니까?, 한다.

남자는 미소를 짓고선,

TV에서 선생님을 봤습니다. 그 병원에서 하신 말씀이 제게 꼭 와 닿았습니다.

병원?

그는 아래를 내려다본다. 그의 옷차림은 아직도 병원의 한자복 차림이었다.

그는 한숨을 내쉰다. 의사의 말을 떠올리며, 손을 놓으며,

감사합니다, 하고선 황급히 그 자리를 피한다. 뒤에서 선생님, 선생님, 하는 소리가 들린다.

가게 문 밖으로 나서면 이젠 제법 길거리에 사람들이 눈에 띈다.

그는 TV라는 것이 이리도 무서운 것임을 깨닫는다.

그가 보지 못하는 것을 그들은 보고 있다.

그러나 도대체 그가 병원에서 한 말이 무엇이 문제였단 말인가?

그는 자신의 발언에 대해 고민한다. 자신을 건들지 말라는 것이 하고자 하는 말의 전부였다. 코가 왜 소중한지에 대해서도 말했었다. -코!

그는 황급히 자신의 코를 만져본다.

아직까진 붙어 있다.

그렇다면 그에게 말을 거는 이들은 코의 소중함을 깨닫고, 그에게서 코를 빼앗으려는 이들인 것인지도 모른다.

코는 안돼!, 그는 생각한다.

그는 그의 손으로 코를 가리고 주위를 둘러본다.

지하로 향하는 계단이 눈에 들어온다. 그는 황급히 발걸음을 옮겨 지하로 향한다.

조금씩 많아지는 사람들의 발걸음- 그는 어딘가에 자리를 잡고, 그의 코를 지키기 위한 방어 태세를 취해야 한다.

그런데 이쪽저쪽에서, 어, 하는 소리가 들린다.

그를 힐끔힐끔 바라보는 눈빛들- 그것은 얼마 전의 그 눈빛과는 전혀 다른 눈빛이다. 무언갈 안다는 눈빛- 그것은 그를 노려보는 눈빛이다.

두려움.

그는 이곳저곳을 둘러본다.

저쪽 한쪽 구석을 보면, 조금 어둡고 사람들의 눈길이 잘 닿지 않을 것 같은 곳이 있다. 그는 그곳에 몸을 웅크리고 앉는다. 제발 아무도 그를 바라보지 않길,

그는 그의 코를 손으로 감싼다. 감싸고 무릎에 얼굴을 파묻는다.

불현듯 배고픔이 그를 엄습한다. 그는 고개를 들어 그의 양쪽 주머니에 있는 과자 봉지를 꺼낸다. 부스럭거리는 소리, 그 소리를 들으면, 어느새 달콤새콤한 냄새가 그의 코를 자극한다. 그는 손을 집어넣어 과자를 집는다.

바스락- 하는 소리가 난다. -이것은 낙엽?

아하 그러면 지금은 가을이구나, 나의 주머니엔 가을이 찾아왔구나.

그는 가을을 생각한다.

그날 저녁, 가을 낙엽이 소소히 떨어지고 있었고 그는 그저 산책시간동안 문 앞에 나와 떨어지는 잎사귀들을 하나 둘 세어보는 중이었다. 갑자기 바람이 불었고, 떨어지던 낙엽이 멀리 날아가자 그는 그 낙엽을 따라 달려보았다. 한참을 달렸다. 그러나 그는 붙잡지 못했고, 어느 순간 정신을 차리고 보니 사방에는 들판이 펼쳐져 있었다. 그는 망연자실하게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 여기까지 흘러왔다. 바깥 생활은 그리 나쁘진 않았다. 그러나 그를 정녕 슬프게 하는 것은 아직까지 그가 출발했던 곳으로 돌아가질 못한다는 것이었다. 그곳에선 아무도 그를 괴롭히지 않았다. 가마안히 코를 지키고 있긴 했지만, 그곳에선 지금처럼 경계를 삼엄히 하지 않아도 좋다. 어차피 아무도 그의 코에 관심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때가 되면 사람들이 밥을 줬고, 그는 그것만으로 족했다. 어쩌면 그는 그곳을 그리워하는지도 모르겠다고, 그는 스스로에게 말을 건네 본다.

저기요.

누군가가 그의 어깨를 툭,툭, 하며 친다.

그는 코를 감싸고 고개를 든다.

저기, 아저씨, 아저씨가 그 사람 맞죠?

안경을 쓴 여자가 그를 바라보고 있다. 그녀는 미간을 살짝 찌푸린다. 찌푸리더니, 그의 손에 들린 널찍한 화면을 보고서, 환하게 웃는다.

아저씨 맞네.

여자가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그에게 내민다. 그는 조금 주저하다가, 한쪽 손을 내밀어 그것을 받아든다. 작은 네모의 종이- 낙엽?

도회일보 기자 임영미에요.

기자?

그는 병원을 생각한다.

낙엽인가?

낙엽이요?

낙엽.

여자가 남자를 바라보다가,

아무튼, 혹시 시간 되시면 인터뷰 좀 할 수 있을까요?, 한다.

그는 고개를 들고 여자를 바라본다. 바라보다가,

가, 한다.

여자는 잠깐 당황하더니 다시 웃음을 지으면서 그에게 말한다.

잠깐만 시간 내주시면...

가.

그가 여자를 노려본다.

가!

여자가 흠칫, 하더니, 미소를 짓고,

그럼 내일 또 올게요, 한다.

그는 여자가 뒤돌아서기도 전에 일어서서 성큼성큼 걸어간다.

주머니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다른 곳을 찾아야 한다. 이곳은 가장 구석진 곳조차도 세상의 중심이다. 세상의 가장 구석진 곳을 찾아야 한다.

그는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사람들의 무리가 이곳저곳을 휩쓴다. 그는 가만히 멈춰 서서, 이곳에서 그가 무엇을 하고 있나 생각해 본다. 그리고 문득 정신을 차려보면, 그는 그를 둘러싸고 그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무리를 발견한다.

그들은 한결같이 손에 그것을 들고 사진을 찍고 있다.

당신들은 누구지?

그가 묻는다. 그러자,

이쪽 한번 봐주세요! 하는 소리가 그의 왼편에서 들린다. 그는 눈을 감는다. 뒤돌아서서, 걷던 방향으로 걸어간다.

아저씨, 하는 소리가 들린다. 눈을 감으면 어떤 것도 보이지 않는다. 오로지 소리,- 그것은 믿을 만한 것이 못 된다- 그리고 냄새만이 그의 세상을 가득 채운다. 그러나 눈을 감는다고 어떤 것도 보이지 않는 것은 아니고, 그의 눈꺼풀을 뚫고 들어오는 묘한 불빛들이 있는데, 그것이 그를 거슬리게 한다. 하지만 지금은,- 지금은?

그는 어찌 됐든 생전 처음 하는 일을 한다. 눈을 감고 걷기.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것은 그를 불행하게 할 것인지, 그는 궁금하다. 그는 어쩌면 아무것도 보지 않고, 가만히 어딘가에 앉아 이것저것의 지나다니는 냄새만 맡고 살아가면 될 것 같다.

냄새- 먹지 않고도 먹을 수 있는 방법.

그는 냄새만으로 뭐든지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보는 것도, 훈련을 한다면 냄새로 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그는 꿈을 꾸더라도 이제는 냄새만이 나오는 꿈을 꾸게 될지도 모른다.

별.

그는 별을 생각한다. 별을 보고싶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또한 그에게 우습다. 방금 전까지 그는 보는 것을 포기하려 했던 자 아닌가.

그는 멈춰 선다. 눈을 뜰지 고민한다. 그런데 갑자기, 툭- 하는 소리가 들리고,

그는 그의 어깨를 바라보게 된다.

무언가가 닿았다.

그는 고개를 들어 그게 무엇일지 찾아보다가, 그의 옆에 그것을 들고 서있는 남자를 바라본다.

아저씨, 사진 한 장만 같이 찍어주세요.

그는 그것의 화면에 떠 있는 그의 얼굴을 바라본다. 남자는 대답을 듣지 않고 찰칵-하는 소리를 낸다. 그리고선,

감사합니다,

하고 동그랗게 웃고 가는 것이었다.

그는 그의 코를 만진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본다.

사람들 손에 모두가 하나씩 그것을 들고 있다.

그는 조금 당황한다.

그들끼리 그것을 바라보며 웃고, 얘기하면서, 그를 힐끔 치어다 보고는 가는 것이었다.

무엇이 문제인지, 그는 고민을 해본다. 그리고는, 결론을 내리진 못한 채로,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은 기분에 주위를 둘러본다.

어지럽다. 무슨 일일까,

눈을 감는다.

정신을 차려보면 눈앞에 남자 하나와 여자 하나가 앉아 있다.

그는 그러면 조금은 당황한다. 아까까지 그는 지하철역을 가로지르는 지하도 한복판에 서 있었는데 말이다.

어지럽다.

아빠.

여자가 입을 열자 그가 여자를 바라본다. 여자 옆에 앉은 남자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한숨을 내쉰다.

아빠, 나 희영이야.

희영?, 하고 생각해보면 그는 어렴풋이 알 것 같기도 하다. 그나저나 그는 아빠였던가?

난 정신병자가 아니야.

그가 말한다.

알아, 나도, 아빠 정신병자 아니야.

다시 고개를 돌리면 그의 옆에 기자가 와 서 있다. 기자를 촬영하고 있는 남자 둘도 보인다. 기자가 외친다.

네! ‘진짜로 간다!’의 김윤희입니다! 오늘 현장에서는 동방의- 디오게네스 선생님을 만나보도록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기자가 그의 눈을 웃으며 바라본다. 그는 그 눈을 바라본다. 눈 속에 비친 그-의 눈-에 비친 기자의 눈-을 바라본다.

깊숙하다.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만, 기자는 아랑곳 않고 질문을 던진다.

거액의 돈을 한 푼도 받지 않고 포기하셨는데요, 그 이유가 뭔가요?

그는 카메라를 한 번 바라보고, 기자를 한 번 바라본다. 눈을 감으면 그의 앞에 앉아있는 여자와 남자가 나타난다. 이번엔 남자가 입을 연다.

아빠, 이젠 그만 하고 집에 가자.

집? 나는 집이 없다, 고 그는 말하려다가, 남자의 슬픈 눈을 마주한다.

난 코만 있으면 된다. 집은 필요 없어.

아빠는 우리를 알아보기나 해?

그는 남자와 여자를 바라본다. 그들의 얼굴이 뭉게구름으로 바뀌고 어느 순간 뒤섞인다.

눈을 뜬다.

기자가 그를 바라보고 있다. 일순 정적-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기자에게서 등을 돌려 걸어간다.

저기, 선생님!

기자가 뒤에서 외치자,

난 선생님이 아니오, 한다. 그 말을 속으로만 했는지, 겉으로 내뱉었는지 그는 기억하지 못한다.

나에겐 코만 있으면 된다!

여자가 울먹거린다.

제발, 그 코 얘기 좀 그만 하면 안 돼?

여자가 벌떡 일어난다.

아빠 정신병자 맞아. 제발 그만 좀 해.

와장창, 하는 소리가 귓전을 때린다.

희영아!, 하고 남자가 뒤돌아 나간다.

희영이?

그는 조금은 익숙한 그 이름을 되뇌인다. 그보다 그는 어느 쪽이 현실인지를 분간해야 한다- 기자?, 남자여자?

어지럽다.

그는 눈을 감고 마구 달렸고, 오른쪽, 오른쪽, 왼쪽, 왼쪽, 오른쪽, 그 옆을 바라보면- 벽.

그는 벽을 마주한다.

그의 뒤에서 누군가가 그를 붙잡는다.

저, 선생님-

그만! 제발 날 내버려 둬!

그가 벽에 머리를 박고 몸을 웅크린다.

선생님, 힘드시죠?

그는 온몸을 부들거리며 떨었다. 넌 누구냐, 제발 날 내버려 두오-

제가 선생님을 지켜드리겠습니다.

남자? 여자? 목소리론 분간이 되질 않는다.

그는 손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코를 감싸고- 고개를 살짝 돌려 본다.

남자다.

저리 가,

그가 말한다.

선생님은 코를 가장 소중히 여기시죠?

그는 대답하지 않는다.

선생님 코는 아무도 건들 수 없게 제가 도와 드릴게요.

그 말에 그는 퍼뜩 놀란다. 그는 조심스레 고개를 돌린다.

남자는 생각보다 가까이에 있었다.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제가 당신의 코를 지켜주는 대신, 당신은 제게 돈을 주는 겁니다.

잠시 침묵,

난 돈이 없어, 그가 대답한다.

압니다. 그래서 저랑 사업을 같이 하자는 겁니다.

그는 사업이라는 말에 적잖이 놀란다.

나랑?

선생님이 하실 일은 그저 앉아있는 일, 그리고 사람들과 얘기를 나누는 일뿐입니다.

그는 남자를 따라서 걸어간다.

남자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그날 아침 그가 일출을 보았던 곳 옆을 지나가, 조금 큰 건물에 들어가고, 정신을 차려 보면 그는 조금은 작은 사무실 안에 들어와 있다.

제가 이렇게 선생님을 찾아 뵌 이유는-, 하고 운을 떼더니,

그가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해대기 시작한다.

그는 듣지 않았다.

결론은- 선생님께서 아주 유명해졌고, 만나 뵙고자 하는 사람이 많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 일을 제가 도우려는 겁니다-

난 만날 생각이 없어.

코를 지켜드릴게요.

그는 남자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넌 돈을 어떻게 얻지?

남자가 하하, 하고 웃더니-

선생님을 만나뵙고자 하는 분들은, 저에게 돈을 지불하게 될 겁니다. 선생님은 그러니까- 돈이 필요 없으신 분 아닙니까?

필요 없지.

그러니 돈은 제가 갖고, 대신 선생님의 코를 지키는 문제는, 확실하게 해결해 주겠다는 겁니다. 추가로 먹을 것도 드리도록 하죠.

눈을 감는다.

아빠. 제발 눈 좀 뜨라고. 매번 이런 식으로 할거야?

눈을 뜨면 그를 사람들이 바라보고 있다. 하얀 유리벽이 그와 그들 사이를 가로막는다. 그는 코는 있지만, 그들의 냄새를 맡을 수는 없었다. 냄새는 코가 있어서 나는 것이 아니었다.

어지럽다.

-어디서부터?

아빠!

그는 고개를 흔든다. 더 이상은-

자리에서 일어나 유리벽을 향해 달려든다. 머리를 박자 쨍- 하는 소리, 의 반복이 그의 귓전을 때린다. 그러나 벽이 울리는지, 그의 머리가 울리는지 그는 알 수 없었다.

웅성거리는 소리, 그는 그의 피에서 나는 비릿한 냄새를 맡는다. 그제야 그는 그의 냄새를 맡는다. 그는 숨을 크게 들이쉰다. 그곳에 다른 이들의 냄새가 섞여들어온다.

그는 묘한 쾌감을 느낀다.

고개를 돌리면- 그는 그가 눈을 감고 있는 별을 발견한다. 그곳에서 뻗어 나오는 일직선의 광선- 그는 몸을 반대로 돌린다. 넓은 우주를 검은 영사막 삼아 한 편의 영상이 펼쳐진다.

그러나 그는 눈을 감고 그것의 냄새를 맡는다.

삶의 향-

눈을 뜬다. 그러면 눈앞에 의사가 앉아 있다.

형욱씨,

의사가 입을 열자, 그가 의사의 말을 가로막는다.

나는 정신병자가 아닙니다.

정신병자가 아닙니까?

아닙니다.

의사가 눈을 감는다. -그도 별을 볼까?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좁은 방 안을 이리저리 배회한다.

당신을 보면- 가끔 미쳐있는 것은 내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적어도 당신은 저보단 행복해 보이는군요.

선생님은 미치지 않으셨습니다.

그럼 정말로 미친 게 맞군요. 당신에게 그런 평가를 받다니.

행복한 것은 미친 것입니까?

난 행복하지 않아요.

그럼-?

당신이 행복하면 좋겠습니다. 제 선택이 부디 올바른 것이었기를.

그는 눈을 감는다.

-그러자 눈이 떠진다.

사람 여럿이 그를 바라보며 소리친다. 그는 그들의 목소리가 멀어짐을 느낀다. 그는 그들의 냄새를 맡고자 한다.

마지막, 마지막, 한 번만, 너희들의 살갗을 내게로 내어다오.

들숨.

날숨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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