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리가 부족했다.
창밖에는 눈이 내리고 있었다. 어느 누구도 입을 열지 않는 조용한 공간- 그 공간의 적막을 채우는 것은 가끔씩의 덜컹거림, 그리고 언제나처럼 매 정거장마다 몇 십 초 뒤의 미래, 그리고 조금 더 먼 미래의 전철에 대해 예언하는 지하철의 안내멘트 뿐이었다.
이른 아침, 아직 해가 뜨지는 않았지만 너무 이르지도 않은, 수많은 영혼들이 비로소 피곤을 털어내고 그들의 삶을 전철에 실어보내기 위해 준비하기 시작할 바로 이 시간의 이 전철에는 언제나 자리가 조금씩 부족하다. 퇴근시간의 지하철처럼 곧 터질 것처럼 사람이 많은 것도 아니어서, 어찌 보면 한산하다고 표현해도 될 정도의 수만이 지하철의 넓은 공간을 무색하지 않게 채워 넣고 있었다.
낭랑한 안내멘트와 함께 40대 후반으로 보이는 작은 체구의 남자가 조용히 자신의 손에 입김을 불어넣으며 기차에 탔고, 그는 항상 즐겨 서 있던 자리- 노약자석과 바로 그 옆의 문 사이의 좁은 공간-에 가려다가, 웬 젊은이가 그의 자리를 차지하고 서 있는 것을 보고서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선 두 번째로 선호하는 자리 – 바로 그 반대편-으로 간다.
그는 오늘 중요한 미팅이 두 건 잡혀있다. 그가 다니는 회사는 에어컨에 들어가는 부품을 만들어 파는 작은 하청업체인데, 이번 계약이 성사되지 않으면 아마 그의 회사는 올 겨울 안에 부도가 날지도 모르는 상황이다. 에어컨 부품을 만드는 회사원들에게 겨울은 지옥과도 같다. 그는 몇 년 전, 에어컨 부품만으로는 살아남을 수 없다고 그의 상사에게 대들었던 자신의 젊은 날을 떠올렸다. 어쩌면 그는 몇 년 뒤 부도 위기의 회사에서 어떠한 일도 해내지 못하는 무능력한 자기 자신의 모습을 내다보았는지도 모른다. 그는 만약 그때 그가 직급이 조금 더 높았다면, 그가 그의 상사와 그 전날에 함께 술을 마셔 주었다면, 하는 등의 돌이킬 수 없는 가정들을 헤아려보며, 아직 다 갚지 못한 대출금과, 자나 깨나 그에 대한 걱정만으로 가득 차 있는 그의 어머니, 그리고 그 밖에 그를 괴롭히는 모든 안 좋은 것들에 대해 생각했다. 밤중에 그런 걱정이 떠오를 때면 그는 술을 마셨지만, 지금은 아침이기에, 그리고 어쩌면 오늘이 그 모든 걱정거리들을 완전히는 아니더라도 – 그는 그러한 희망을 저버린 지 오래다- 조금은 덜어줄지도 모를 날이기에, 그는 조금은 자신감을 가져보기로,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는 아직 날이 어두운 것을 보고 겨울임을 새삼 깨달았다. 그는 겨울에는 해가 뜨기 전에 출근했고, 여름에는 해가 뜨고 나서 출근했다. 출근하는데 해가 아직 뜨지 않았다면, 그것은 아직 겨울이라는 뜻이다. 그는 순간 끔찍한 상상을 했다가, 황급히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어 들었고, 오전이라는 사실을 확인한 뒤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노약자석 옆 철봉과 벽에 기대어 서 이어폰을 귀에 꽂고 음악을 듣고 있던 청년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계속 표정이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키 작은 중년 남성의 얼굴을 힐끔거리며 바라보다가, 핸드폰 화면을 보고서 한숨을 내쉬며 팔은 아래로, 고개는 위로 드는 그의 눈과 마주쳐버렸고, 황급히, 약간은 부자연스러운 몸짓으로 그녀의 핸드폰을 들어 화면에 떠 있는 플레이리스트를 하릴없이 확인했다. 물론 지금 듣는 노래를 그는 사랑했기에 다른 곡을 재생할 생각은 전혀 없었지만, 괜히 휴대전화를 흔들어서 이어폰 줄이 그의 옷가지들에 부딪혔고, 툭,툭, 하는 소리가 그녀의 심경을 조금은 짜증나게 했다.
그녀는 헤드셋을 끼고 올 걸- 하는 나름의 후회를 했다. 줄이 옷가지에 부딪히는 소리가 조금은 적게 들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렴 어떤가, 조용한 지하철에서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노래를 듣고 있는 것- 그 노래는 조용하기에 주변이 시끄러우면 결코 들을 수 없는 노래다-은 나름의 행운일 지도 모른다. 어찌 됐든 고시 준비를 하면서 1년째 대학이 아닌 대학 도서관으로 등교하고 있는 그녀에게, 이른 아침의 조용한 지하철, 그리고 조용한 노래, 그리고 창밖에 간간이 펼쳐지는 꽤 그럴듯한 도시의 아침 풍경은 조금은 큰 사치일지도 몰랐기에, 그녀는 내심 만족하며, 도서관에 가기 전에 아메리카노 하나를 사서 마시면 근사한 아침이 될 것이라고, 그래서 오늘 하루 종일 공부도 잘 될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설레어했다.
전철은 어느덧 지하에 내려왔고, 조금은 삭막한 풍경이 그녀가 바라보던 창밖을 채웠다. 늘 보는 똑같은 풍경의 전환이 이루어질 때면 그녀는 그녀의 인생이 지하철과의 경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녀가 지하철에 올라타면 경주가 시작되는 것이다. 그녀가 꼬리칸에서 타든, 제일 앞 칸에서 타든, 그녀는 아무리 전철 안에서 열심히 달려봤자 영원히 전철을 따라잡을 수는 없다는 사실을 처절히 깨닫는다. 그녀가 전철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전철 밖으로 내리는 것뿐이었다. 그녀는 비록 정해진 길 위를 달리고 있지만, 언젠간 목적지에 도달하고야 말겠다고, 그래서 영원히 자신을 따라오지 못하는 지하철을 비웃어주겠다고, 나름의 다짐을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하지만 우리 사회, 아니 세상 전체가 하나의 커다란 지하철이라면?-그녀는 그 문제는 일단 고시에 붙고 나서 생각하기로 했다. 일단 붙기만 한다면- 그녀를 괴롭히는 수많은 고민들은 조금은 사라질지도, 어쩌면 고민하지 않아도 되는 문제로 전락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녀는 창문에 희미하게 비치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볼살이 올라 아픈 것처럼 부어있었다. 그녀의 책가방이 무거워지는 만큼 그녀의 몸도 무거워져갔다. 그녀는 시험에 합격하면 그 길로 헬스를 등록하고 PT를 받아야겠다고, 소위 말하는 ‘자기관리’라는 걸 좀 해 보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물론 트레이너에게 코칭을 받는 게, 어쩌면 그녀의 집안 살림으로는 꽤 비쌀지도 모르겠지만, 합격했는데, 그 정도 돈이 대수가 되지는 않을 게다.
고시생과는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서 다른 젊은이는 핸드폰 화면을 바라본다. 그는 유튜브에 들어가려다가, 그 전날 자신이 지하철에서 이어폰 선을 끊어먹었다는 사실을 깨닫고선, 당분간 지하철에서 동영상은 못 보겠네, 라며 아쉬워한다. 비싼 이어폰은 아니었지만 그가 나름 오랫동안 써 왔기에, 그는 한동안 그 물건을 떠나보내는 마음속에서의 의식을 치러야 하는 것이었다. 물건을 망가뜨리거나 잃어버렸다고 곧바로 새 물건을 사지 않는 그의 습관은, 고등학교 때 공부를 하다가 샤프를 망가뜨리고, 곧바로 새 샤프를 사자마자 잃어버린 일을 겪은 뒤부터다. 모든 것에 예민하던 수험생 시절에, 비싼 샤프를 연속이나 두 번 잃는 경험은 꽤나 큰 스트레스를 주었고, 어쩌면 겨울이 다가올 봄을 시샘하듯이, 과거의 나의 물건이 나에 대한 애착을 가지고 있었기에, 곧바로 새로운 물건이 자신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을 막을지도 모른다는, 이상한 상상을 하게 된 것이다. 그는 자신이 생각해도 어처구니가 없는 상상이지만, 확실히 새로운 물건을 사지 않는 것은 새로운 이별의 가능성을 아예 차단하는 것이기에, 한동안의 불편은 감수하더라도, 잃는 것에 대한 두려움 자체는 사라진 채로 편안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무언가를 잃는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그는 그의 어머니를 생각했다. 그날, 어머니의 잔소리를 듣고 대문 밖으로 나서는 게 아니라, 그냥 평소처럼 그의 방으로 돌아갔다면 어떨까, 그래서 어쩌면 목이 말라서 물을 마시러 거실로 나왔다면, 그는 그의 어머니를 조금 더 빨리 발견했을지도 모른다.
그는 이제 눈물을 흘리지는 않았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아끼는 일이 이제 그에겐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양 다리 사이에 놓인 베이스기타의 케이스를 붙잡았다.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친구들과 그는 오늘 밤 공연을 한다. 그의 음악과는 스타일이 조금 달랐지만, 배울 점은 많은 친구들이었다. 마침 베이스 자리가 비어서 그 친구들은 급하게 빈자리를 채워줄 이를 찾고 있었고, 덕분에 그는 운 좋게 무대에 오를 수 있게 되었다.
“괜찮은 것 같으면 계속 같이 하자.”
보컬을 하는 형의 말이었다.
그는 또다시 잃을 무언가를 얻을 것인가, 잃는다면 언제 잃을 것인가 두려웠다. 그 불안이 그의 음악에는 담겨 있었다. 그를 아는 이들은 그래서 그의 음악을 좋아했다. 잃는 잃을 멈추면, 그는 타인의 사랑을 잃을 것이었다. 어찌 됐든 그에게 무언가를 잃지 않고 다른 무언가를 얻는다는 것은 불가능해보였다.
어찌됐든 그는 그의 삶만은 잃을 수 없었다. 샤프를 잃어버렸던 그 한 해 동안 그의 길이 어찌 됐든 공부를 해서 누군가에게 인정받는 과정은 아니었음을 처절히 깨달았으니까, 그러니 그는 어제도, 엊그제도 밤을 새서 음악과 씨름했고, 오늘 밤에도 마찬가지일 것이었다. 낮과 밤이 뒤바뀐 삶- 모두가 새로운 출발을 꿈꿀 때 그는 잠시의 휴식을 원하는 것이었다.
눈을 그러니 감아야겠다. 그는 눈을 감기 전, 조금 멀리에 서 있는 자기 또래의 한 여자를 바라본다. 가끔 지하철에서 마주쳤던 여자다. 눈이 반짝거린다. 초췌한 얼굴, 힘겹게 걸친 듯한 두꺼운 옷들 위에 오롯하게 눈만이 반짝인다. 그는 휴대폰을 들어 불이 꺼진 화면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본다. 푸석푸석한 얼굴, 초췌하기는 마찬가지였지만, 그의 눈에는 저 멀리 서 있는 이의 눈빛이 없었다. 그는 그녀를 언제까지 마주칠 것인가, 그가 먼저 이 지하철을 뜰 것인가, 그녀가 이 지하철을 먼저 뜰 것인가- 아마 그녀가 먼저일 것이다. 그는 확신한다.
그러니 그는 눈을 어서 감아야했다.
시간은 계속해서 흐르고, 전철은 꿋꿋이 찬바람을 가르고 달려가고 있었다. 어느새 땅 밖으로 나온 전철은 가로수들을 지나치고, 무표정한 이들을 지나쳐 그의 목적지로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전차는 여전히 조용했다. 신문을 꺼내서 읽던 늙은이는, 자신과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아있는 청년을 바라본다. 그는 커다란 가방에 든 악기를 품에 안고 잠들어있었다.
그는 자신의 아들을 떠올린다. 음악을 하겠다고 했을 때 그는 몽둥이를 들어 아들의 악기를 다 때려 부수고야 말았다. 아들은 어엿한 직장인이 되었고, 지금도 가끔 그 얘기를 하는 것이었다.
그 길로 안가길 잘 했다는 말, 그러나 자신과 함께 늙어가는 아들에게선 씁쓸한 웃음이 보였다.
어쩌면 그가 직장에 들어가지 않았더라면 적어도 명절때만큼은 함께 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텔레비전에서든, 아니면 집에서든. 그러나 그는 그 일을 후회하지는 않았다. 그냥 그 뿐이었다. 시간이 지난 뒤에야 조금씩 돌아볼 여유가 생기는 가지 않은 길들을, 살아온 날이 그의 어깨를 짓누르고, 살아갈 날이 그의 뒤를 힘겹게 쫓아오는 그 때가 되어서야 그는 그러한 여유가 생기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가슴 속에서 피어오르는 감정들에 무감각해진지 오래였다. 이른 아침, 졸고 있는 이들과 졸고 싶어 하는 이들 사이에서 이런 생각들을 해 본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의자 밑에서는 따듯한 바람이 불어나오고 있었다. 사람들은 따뜻해져오는 자신의 하반신에 만족하며 잠을 청하기 위해 눈을 감았다가, 갑자기 그들의 눈을 때리는 붉은 빛에 눈을 뜬다. 그들의 앞에는 한강 다리를 건너는 지하철을 노려보며, 그들을 집어삼킬 듯 떠오르는 태양이 있었다.
우중충한 구름들에게 수치심을 안기며, 태양은 자신의 존재감만으로 겨울의 아침을 몰아낸다. 잔잔한 것처럼 보이던 물결은 비로소 자신의 살결에 흩뿌려진 붉은 피와 그림자를 과시하며 그 발걸음을 재촉하고, 새들은 아직 달구어지지 않은 철판에 손을 대 보듯이 조심스럽게 그들의 세상을 어루만진다. 조용하던 지하철에 붉은 도화지가 펼쳐진다. 몇몇은 창밖을 바라보고, 몇몇은 다시 눈을 감는다. 늙은이는 붉은 바탕에 그려진 자신의 그림자를 바라본다.
아주 잠깐, 중년의 남자는, 지하철이 그가 서 있는 한강의 다리 위에서 멈추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중요한 미팅이 두 개나 있지만, 조금은 늦어도 될지도 모른다. 그는 피곤에 젖은 자신의 눈을 감지 않으려 노력하며, 작렬하는 태양빛과 수면의 일렁이는 파문, 그리고 새로이 약동하는 도시의 하루를 초라해진 가슴 속에 품어 보려고 애를 썼다. 책가방을 짊어진 젊은 여자는, 그 광경을 자신의 카메라에 담고 싶었지만, 중년의 남자가 창문 앞을 가로막고 서 있다는 점에 아쉬움을 느꼈다. 그녀는 무표정한 이들과 태양을 바라보는 중년의 남자, 그리고 그 풍경을 바라보는 자기 자신에 대해 생각했다. 태양이 아니라 그 장면 자체를 카메라에 담아도 좋을 것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어찌 됐든 그것은 아름다웠고, 그녀는 그제서야 잠시나마 자신의 어깨를 무겁게 짓누르는 책들의 무게를 잠시 잊고, 따듯한 햇살을 만끽할 수 있었다.
잠에 빠지려다가 눈을 뜬 남자는, 붉게 물들어 있는 여자의 행복한 표정을 바라본다. 그의 가슴 한켠에도 뜨거운 무언가가 채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잠깐 고개를 돌려 창 밖을 보고 싶었지만, 옆자리에 앉은 사람들 모두 다 잠들어있어서 몸을 크게 움직일 수 없었다. 그는 약간의 아쉬움을 느꼈지만, 그런 기분이라면, 자리에 앉아서 자신의 삶을 생각하는 모든 이들에게 정말 뜬금없게도 좋은 아침이라고 인사를 건넬 수도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는 실천에 옮기지는 않았고, 그저 조금 좋아진 기분과 함께 다시 눈을 감았을 뿐이었다.
여자는 반대쪽으로 뒤돌아서서 창문 밖을 바라본다. 일렁이는 수면 위에는 자신이 타고 있는 전철의 그림자가 물결보다 더한 일렁임으로 맺혀 있다.
다시 고개를 돌려 하늘을 바라보면, 태양은 여전히 붉다.
전철은 멈추지 않고 계속 달렸고, 사람들은 내릴 준비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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