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학생총회니, 회의니, 이것저것 일이 많아 학교에 밤까지 있다가 12시가 거의 다 되어서야 역삼에 도착한 날이 있었다.(나는 역삼에서 자취중이다) 역삼 소재의 작은 스타트업에서 근무하는 여자 친구는 그때에도 퇴근하지 못하고 남은 작업들과 개인적인 일들을 해결하고 있었다. 나는 곧바로 집에 가지 않고 잠깐 그녀를 보러 사무실 앞으로 찾아갔고,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웃는 얼굴로 서로를 껴안았다. 하루 중 유일하게 자극적이지 않은, 담백한 맛의 평온한 미소를 지을 수 있는 시간— 나는 그 미소 뒤에 무엇이 있는지 쉬이 상상하지 못했다. 나의 하루만큼, 그녀의 삶도 또다른 의미로 고단하고 치열했을 것이라 상상할 뿐이었다. 그저 그렇게 살아가는 것, 그리고 그 하루 끝에 미소 짓는 것. 나는 정확히 어떻게 묘사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어쩌면 이것이 앞으로 내가 추구해야 할 삶의 모습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1.
우리는 잠깐 산책을 한답시고 사무실에서 내 자취방까지, 다시 사무실까지 걸었다. 그 잠깐의 산책 뒤에는 해야 할 일들이 잔뜩 기다리고 있는 터였다. 나는 서양사학과 전공수업을 교양 삼아 듣겠다던 학기 초의 패기에 대한 대가를 치르는 중이었고, 여자친구는 제품 패키지 디자인이니, 게임 그래픽 디자인이니 하는 내가 잘 모르는 일들을 한가득 해야 했다. 역삼역을 지나쳐 회사로 가는 골목길로 들어섰을 때, 여자친구가 갑자기 하늘을 가리키며 “목성이다!”라고 외쳤다. 그녀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가 보니, 작고 하얀 점 하나가 밝게 반짝거리고 있었다.
“어떻게 알아?” 내가 물었다. 2019년 5월 28일의 밤하늘에 무엇이 보여야 하는 것인지에 대한 지식이 난 전혀 없었다. 당장 어느 방향이 북쪽 인지도 모르는 내가 별들의 운행을 어찌 알겠는가. “아마 맞을걸?” — 다소 확신에 찬 그녀의 대답이었다. 나는 한번 확인해보자는 말에 별자리 앱을 다운받은 뒤, 앱이 보여주는 밤하늘과 내가 보는 밤하늘을 비교했다. 그녀가 말한 목성은 정말 목성이 맞았다.
2.
여자친구는 내 손을 왼쪽으로 잡아끌었다. 그러자 화면에 토성, 견우성, 직녀성, 데네브가 차례차례 나타났다.
저기 전봇대 오른쪽을 봐봐, 전깃줄 바로 위를 봐봐,
나는 그녀의 뒤에 서서, 그녀의 눈높이에서 별의 위치에 대한 지극히 주관적인 설명을 들으며 그녀의 손가락 끝을 쫓아갔고, 목성만큼 밝지는 않지만 각자의 자리에서 빛나고 있는 별들을 볼 수 있었다.
“견우성하고 직녀성 사이에는 은하수가 흘러.”
“그래? 근데 안보이네?”
“응. 근데 은근히 저 가운데 부분만 밝은 것처럼 느껴지지 않아?”
그 말을 듣고 보니 그런 것도 같았다. 나는 두 연인 사이에 흩뿌려져 있는 빛의 알갱이들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저 너머에 별들이 있다. 다만 인간의 밤을 수놓는 수많은 가로등과 전광판과 사무실의 공세에 잠시 물러나 있을 뿐이었다. 연인의 운명적인 서사에서 마치 은하수는 둘 사이를 가로막는 벽이어야 할 것만 같지만, 나는 어쩌면 그것이 다리의 역할을 해 주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마음만 먹으면 다리를 건널 수 있다. 그들에게 필요한 진실은 이것 하나였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그 둘은 영원의 시간을 견뎌낼 것이었다.
3.
“나는 별에 대해 이야기하는 노래가 공감이 안돼. 그 사람들 전부다 서울 살 텐데, 서울에서는 별이 잘 보이지도 않잖아.”
언젠가 내가 여자 친구에게 했던 말이었다. 현대의 한국 문화에서 ‘별’의 역할은 클리셰 그 자체라는 게 내 말의 요지였다. 그 말에 그녀는 “별 잘 보이는데?”라는 가벼운 말 한마디로 응수했다. 나는 더 할 말이 없었다.
사실 생각해보면 별을 보지 않으려 했던 것은 나 자신이었다. 하루가 끝날 때쯤이면 고개를 숙이고 걷는 내게 밤하늘은 그저 가로등 불빛의 배경에 불과했지, 수많은 빛이 약동하는 공간은 결코 아니었다. 반대로 그녀는 고개를 들어 별을 찾아 헤매는 법을 알았다. 그리고 기어이 희미하게 빛나는 별들을 찾아 그것들을 하나하나 호명해주었다. 그 차이를 만든 것은 어딘가에서 정말로 별이 빛나고 있다는 믿음의 유무였는지도 모르겠다.
4.
내가 보지 못한 ‘별’들이 더 있을까? 보이지 않는다고 믿고선 찾으려는 시도도 하지 않았던 것들이 또 있을까?
분명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걸 내가 무슨 수로 알겠는가.
—나는 아직 별자리 앱을 삭제하지 못했다.
사진출처:
https://ko.wikipedia.org/wiki/%EC%9D%80%ED%95%98%EC%88%98#/media/File:ESO_-_Milky_Way.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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