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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글

감정에 대하여

by 고우 2019. 5.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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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끔 아무런 생각 없이 글만 쓰고 싶은 때가 있다. 특히 수많은 사람들이 나의 인생에 휘몰아쳐 들어왔다가 나간 날이라던가, 내 안에서 솟아난 감정들이 나도 따라잡을 수 없는 속도로 달아난다던가 하는 날에는 내가 집착하던 모든 공부, 일, 인간관계 따위의 것들을 내려두고서 가만히 방 안에 틀여 박혀서 혼자서 컴퓨터 자판이나 두들기고 싶은 것이다.

 이럴 때 내가 꿈꾸는 이미지는 대강 이렇다. 좁은 방. 반투명한 유리창. 회색빛이 어렴풋이 들어온다. 우중충한 날씨에 고요한 적막. 방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는 옷들과 이불, 베개, 그리고 그 비슷한 것들. 나는 이 방 안에서 엎드리기도 하고, 일어서기도 하고, 기지개도 켜고, 그러나 대개는 웅크려 앉은 채로 골똘이 생각에 잠겨 조심스레 그것들을 활자로 옮기는 것이다. 나의 가장 내밀한 관계에 들어와 있는 이들마저도 침범할 수 없는 지극히 개인적인 그 공간에 하루고, 이틀이고 기약없이 숨어서 내 인생을 이루는 여러가지 것들을 꺼내어 놓고서 이리 보고, 저리 보고, 내팽겨쳐보고 싶은 것이다. 그러면 나에게 조금이라도 고통을 주었던 모든 것들이 고맙게도 조금씩 자리를 비켜주고 혼자서 그것들에 대해 생각할 기회를 줄 지도 모른다. 그것들이라고 내가 좋아서 내 인생에 들러붙어 있는 것은 아니겠지. 그것들이나 나나 그저 평화로운 삶을 꿈꾸는 것인지 모른다. 안타깝게도 나는 애초에 '온전한 나 자신만의 공간'이라는 것을 가져본 적이 없기 때문에, 단 한 두 시간만이라도 이런 경험을 해본 적이 없다.

 슬플때 슬프다고 울 수 있는 용기, 웃고 싶을 때 누구보다 즐겁게 웃을 용기 나는 이런 류의 용기가 부족하다. 그리고 평화라는 것은 대개 그런 것들을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는 삶에서 비롯한다. 나의 인생에 솔직해지는 것, 그리고 나의 감정에 솔직해지는 것- 그러니 아직까지 나의 삶은, 내가 원하는 만큼 평화롭지는 않은 것 같다. 적어도 나는 나의 눈물로 인해 함께 눈물 흘릴 이들을 느끼고, 그들의 눈물로 인하여 내가 다시 눈물 흘리게 될 것도 안다. 그것만도 괴로웠는데 요새는 나의 웃음을 위해 희생했을 수많은 이들의 작은 움직임들마저 조금씩 이해하게 되는 느낌이라 더더욱 고통스럽다. 그러니 삶이라는 것은 누구 말마따나 조금씩 힘겨워지기만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만약 그렇다면 내가 꿈꾸는 평화는 어린 시절의 잔상으로밖에 남지 않게 될 것이다. 이제 나의 남은 인생은 그걸 받아들이면서 울어야 할 때 웃고, 웃어야 할 때 우는 것으로 가득 차게 되겠지. 이것은 이제 막 고등학생 티를 벗은 아이 어른의 단상이다.

 내가 다른 누군가의 인생의 가장 내밀한 곳까지 닿아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꽤나 두려운 과정이다. 나는 그것을 나의 옛 친구가 자살을 하겠다며 돌연 사라질 때에, 랜덤채팅에서 우연히 만난 사람이 다음날 자살을 할 것이라며 마지막으로 얘기를 들어줘서 고맙다고 할 때에, 그리고 그 모든 과정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음을 처절하게 깨달을 때에 어렴풋이 느꼈다. 이 깨달음은 역설적이게도 매일같이 내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커터칼과 설거지통 옆에 꽂혀있는 식칼과, 날카로운 펜촉의 끝이 나의 손목을 사랑해 마지못해 핥고 싶어하는 것 같다고 느끼던 순간에도, 그 일을 저지르기만 하면 마치 내 안에 있는 모든 피와 눈물이 쏟아져 나와 증발해 버리고 나는 영원히 자유로워질 것만 같은 기분이 들던 순간에도, 그 일을 하지 않게끔 막았다. 야속하고 역겨운 감정의 독재정치— 아마 무인도에 홀로 놓여 있었다면 나는 매일 저녁 내 손목을 그으며 그 시원한 고통이 주는 즐거움을 만끽했을 것이다. 그렇게 서서히 내 몸을 망쳐갔겠지만 어떤 면에선 행복했을지도 모르겠다.

 감정은 전염된다. 인간의 육체 덩어리는 그저 감정의 이동 경로에 지나지 않는다.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부터 인간은 영원히 자신을 스스로의 감정으로부터 속박한다. 감정에서 해방되기 위해 스스로를 옥죄는 과정은 얼마나 잔인한가. 역설적이게도 그러면 그럴수록 육체는 감정이 마음껏 속도를 높일 수 있는 단단한 아스팔트 바닥으로 전락하고 만다.

 우리는 타인의 삶에 얼마나 관여하는가? 우리는 타인의 삶에 어느 정도의 책임이 있는가? 이 문제에 관하여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가 없다. 완전한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면 나는 아마 견디지 못할 것이고, 아무런 책임도 없다고 생각한다면 그 또한 자위에 불과한 것일 게다. 다만 내 무지가 초래한 비극의 피해자들에게 조용히 속죄하며 살아가려 노력할 뿐이다.

 이제 나는 행복이라는 단어에 대해 생각한다. 나는 그럴 때면 내가 온전히 사랑하고, 나를 온전히 사랑하는 이와 손잡고 마주 앉아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늙어가는 것에 대해, 서로의 죽음이 가까워졌음을 목도하고 서로의 팔목에 죽음에 이르는 약이 담긴 주사바늘을 꽂아주는 것에 대해 생각한다. 배경은 새하얗게, 나무 책상을 사이에 두고, 나무 의자에 앉아 서로의 손을 꽉 잡은 두 사람은 너무나 기쁘고 행복한 나머지 환한 미소와 함께 눈물을 흘릴 것이다. 그들은 눈물을 너무 많이 흘려 잠깐 눈을 감을 것이고, 다시는 눈을 뜨지 못할 것이다. 온 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끼며, 그제야 육체가 가진 힘이 사실은 별 쓸데없는 것이었음을 깨닫는 것이다. 그들이 느끼는 마지막 감각에는 날카로운 바늘의 차가움, 그리고 서로의 따듯한 살갗이 있을 게다. 

 —용기 없는 이의 상상은 여기에서 그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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