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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지식들

젠더 권력의 재생산: 90년대 대한민국의 성폭력 담론

by 고우 2019. 5.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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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젠더 권력을 분석하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주제는 바로 성폭력이다. 사실 성폭력은 페미니즘의 용어로써, 기존의 강간개념이 설명하지 못했던 젠더 폭력의 문제를 명명하기 위하여 고안된 개념이다. 강간이라는 단어는 오랜 역사를 가진 개념으로, 해당 사회가 여성을 어떠한 존재로 바라보는지, 성관계를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따라 그 의미가 조금씩 달라져 왔다.[1] 예컨대 우리나라에도 강간죄1953년부터 존재했다.[2] 그러나 남성이 젠더권력을 독점한 사회에서 여성에 대한 성범죄는 어디까지나 남성의 소유물에 대한 침해수준에서 다루어지고 있었다. 그것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형법의 조문인데, 2012년 법 개정 전까지 형법은 강간죄폭행 또는 협박으로 부녀를 강간하는 행위를 일컫는 것으로 정의했다. 심지어 아내는 사전적 의미에서 부녀자임에도 불구하고 강간죄의 객체에서 제외되기까지 했는데, 당시 우리 형법 학계의 통설은 2000년대 초까지 아내에 대한 강간죄는 성립하지 않으며, 기껏해야 강요죄’(형법 제 324)가 성립할 뿐이라는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3] 대부분의 아내 강간이 정상적 부부관계가 파탄이 난 상태에서 남편의 아내에 대한 폭력의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4] 이러한 입장을 고수했다는 것은 결국 당시 한국 사회에서 여성의 성적 자기결정권은 어디까지나 남성의 독점적 재산으로써 간주되는 것이었음을 보여준다. 한국여성개발원의 1992년 보고서에 이러한 형법이 강간범에 대한 법적 처벌은 강간이라는 남성의 행위에 의해 그 가치가 감소하게 된 딸이나 아내의 소유주라 볼 수 있는 남성에 대한 보상의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지극히 남성주의적인 처벌규정이라는 평이 등장하는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이다.[5]

 사실 이는 당연한 것이기도 하다. ‘에 관하여 처벌하는 것은, 사실상 그 사회가 성을 어떻게 바라보는지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젠더 권력이라는 것이 섹슈얼리티를 바라보는 관점이 실재적인 법과 규범으로써 등장하고, 그러한 제도를 통해 끊임없이 스스로를 재생산하는 모습을 강간죄에 대한 탐구로부터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6]

 페미니스트들은 강간이라는 개념 자체가 내포한 성차별적 이데올로기에 대항해왔다. 성희롱, 성폭력, 성적 학대, 데이트 강간, 아내 강간 등의 개념이 창조된 것은 그러한 노력의 결과물로써,[7] 사회가 당연시해온 성폭력의 문화를 문제시하게끔 하는 데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80년대까지만 해도 일반인들에게는 굉장히 낯선 용어였던[8]성폭력이라는 단어가 오늘날의 우리에겐 익숙하다는 사실 자체가 페미니즘이 이루어 낸 하나의 성과인 셈이다.

 “성폭력개념이 젠더 폭력의 문화에 대응해서 나온 것인 만큼, “성폭력자체에 대한 논의 과정을 추적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사실상 그 과정은 젠더 권력에 대항하여 탄생한 개념이 어떻게 다시 젠더 권력 내로 편입되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성폭력의 개념이 하나의 제도로써 안착되기까지 그 개념은 끊임없이 표류하고, 새로운 성적 가치관의 등장 등과 맞물려 그 의미의 변화를 겪곤 했는데, 그 결과로써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젠더 폭력의 문화가 다른 형태로 표현된 것에 불과한 것이었던 셈이다.

 결국 젠더 권력에 대항하는 개념은 어떻게 젠더 권력에 포섭되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젠더 권력에는 어떠한 변화도 발생하지 않는 것인지 등에 대해 살펴보기 위한 가장 중요한 도구가 성폭력 담론이 되는 셈이다.

 

 여기서는 1990년대 이후의 성폭력 담론을 중점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다. 그것은 90년대 이후부터 한국 여성학이 성폭력을 본격적으로 공적 문제로 다루기 시작했기 때문이다.[9]성폭력 추방운동으로 통칭되는 정치적 운동들은 91년 한국성폭력상담소의 개소, 93년도 신교수 사건[10]에 대한 공동대책위원회, 94년 성폭력특별법 제정 등 여러 영역에서 활발하게 이루어져 왔다.[11] 이러한 운동의 주된 관심사는 위에서 언급했듯 정조의 문제로 여겨져 왔던 성폭력 사건들을 성적 자기결정권의 침해라는 측면에서 재정의하면서 다양한 성폭력의 유형을 세분화하여 대응전략을 짜는 것이었다.[12]

 90년대 한국사회의 성폭력 추방 운동의 시기는 대체적으로 (1) 성폭력 범죄의 주체화로부터 여성단체들이 성폭력특별법 제정을 추진하는 시기(1991~1993), (2) 성희롱 문제의 주제화와 더불어 그 입법화가 추진되는 한편으로 반성폭력운동이 대학 내의 성 정치와 만나 급진화되는 시기(1993~1999), (3) 이 급진화의 효과가 시민사회의 젠더 갈등으로 표출되는 시기(1999 이후)로 나눠볼 수 있다.”[13]

 90년대 성폭력 추방 운동의 시작은 1988년의 변월수씨 사건[14]이 그 발단이 된다. 당시 언론에 해당 사건이 보도되면서 성폭력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증폭되었고, 여성학계 및 연구단체의 성폭력에 대한 조사 연구가 활성화되며 성폭력 문제에 관한 여론이 조성되기 시작된 것이다. 1991년 김부남 사건[15] 이후 여성단체들 간에 성폭력특별법 제정의 필요성에 대한 공감되가 마련되고, 마침내 19918월에 성폭력 특별법 제정 추진위원회’(이하 성폭력특위)가 구성되었다.[16] 그 후 한국여성단체연합에서 성폭력 문제를 1992년의 중점 사업으로 택한다.[17]

 성폭력의 정의를 성적 자기결정권의 침해로 삼는 것은 성폭력특위가 제시한 성폭력 특별 법안의 핵심적인 사항이었다. 사실 이전까지도 여성단체들 간의 성폭력의 정의에 대한 입장은 통일되지 않았었다. 사실 80년대 중반 당시의 성폭력의 의미는 어디까지나 강간, 아내구타, 매춘, 인신매매 등으로 대표되는 여성의 문제를 대변하는 용어였다. 이러한 기조를 바탕으로 당시 <여성의 전화>는 성폭력을 (1) 성적인 폭력(Sexual Violence)-성폭행(강간, 성추행 등) (2) 여성에 대한 폭력(gender-violence)-남성과 여성 간의 구조적 힘의 불균형에서 비롯하는 다양한 폭력, (3) 육체적 폭력뿐 아니라 심리적, 언어적 폭력의 세 가지 차원으로 정리한다.[18] 즉 단순히 성적 자기결정권의 침해뿐 아니라 여성에 대한 폭력으로 접근해 온 셈이다.[19] 반면에 한국성폭력상담소는 성적인(sexual) 의미를 통해 성폭력을 정의했다.[20]

지난한 협의 과정을 거쳐 나온 정의는 다음과 같다.

 

성폭력이라 함은 성을 매개로 이루어지는 무형, 유형의 강제력 행사를 말한다. 광의의 성폭력에는 협의의 성폭력과 가정폭력이 포함된다. 협의의 성폭력에는 인간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침해하는 모든 행위를 포함한다.”[21]

 

 이러한 정의는 성폭력을 성적인 폭력뿐만이 아니라 아내구타와 같은 젠더 폭력을 동시에 의미할 수 있는 다층적인 개념으로 정리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당장의 현안인 성폭력특별법에 관하여 광의의 성폭력에 초점을 맞출지, 아니면 성적인 폭력에 초점을 맞출 지에 대한 선택은 정치적으로 불가피한 것이었다. 결국 성폭력특위는 성적인 폭력에 초점을 맞추었다. 다음의 표는 한국 여성단체연합 내부에서 성폭력특별법 제정과 관련하여 이루어졌던 성폭력 정의의 변화를 단편적으로 보여주는데, 결과적으로 제정된 성폭력 특별법에 성폭력 범죄에 대한 별도의 정의 없이 형법 조항들을 나열했다는 점은, 젠더 권력의 구조를 강조하던 성폭력에 대한 기존의 여성학의 입장이 정치적 과정을 거치면서 결국 조금씩 성적인 의미가 강조되기 시작하면서 그 의미가 퇴색된 결과물이라고 볼 수 있다.

 

1. 한국 여성단체연합(여연) 성폭력특별법제정추진위원회 시안검토모임 문건 (신상숙, 2001)

 

목적

정의

여연 성폭력특위 검토

시안 A.

(1992.4.13)

"이 법은 여성의 성에 관한 자유를 침해하는 행위를 가중처벌하고 여성의 지위향상을 도모함을 목적으로 한다.“

‘성폭력’은가정폭력좁은 의미의 성폭력을 통칭.

여연 성폭력특위 검토 시안 B.

(1992.4.20)

“이 법은 사람의 성에 관한 자유를 침해하는 행위를 가중처벌하고 여서의 지위향상을 도모하며 성폭력을 규제하여 사회질서를 확립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성폭력’은가정폭력성적 자기결정 침해를 통칭.

여연 성폭력특위

보도자료.

성폭력  대책에 관한 특별법()”

(1992.7.3 발표)

“이 법은 성폭력 행위의 예방, 처벌, 치료 및 피해자보호에 관한 대책과 특별한 처리절차를 마련함으로써 국민의 인권보장과 건강한 사회질서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한다.”

‘성폭력, 성적 자기결정 침해는 이 법에 정한 죄 중 사람의 성적인 자유를 침해하는 일체의 행위.

성폭력 범죄의 처벌 및 피해자 보상 등에 관한 법률

(1993.12. 국회 통과)

“이 법은 성폭력 범죄를 예방하고 그 피해자를 보호하며, 성폭력 범죄의 처벌 및 그 절차에 관한 특례를 규정함으로써 국민의 인권신장과 건강한 사회질서의 확립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한다.”

‘성폭력 범죄는 별도의 정의가 없이 해당 범죄들의 형법조항들을 나열.

 

 당시 성폭력 특별법이 매우 빨리 통과된 것은, 사실상 기존의 정조권 보호 등에 관한 남성 중심적인 젠더 권력의 입장-, 여성의 정조권에 대한 소유자로서의 남성들의 걱정-, 섹슈얼리티를 강조한 성폭력의 정의가 표면적으로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었기 때문으로 해석할 수 있다.[22] 성폭력특별법을 적용한 판례뿐석을 통해서도 드러나고 있듯이[23](김엘림, 2000) 이는 사실상 기존의 강간죄가 가지고 있었던 개념적인 문제가 성폭력의 에 유입된 것에 다름아니었다. 결과적으로 여성주의 기획이었던 성폭력의 개념은 기존 젠더 권력의 헤게모니 안에 갇히게 된다.[24]

 이후 여성주의 기획은 1993년 신교수 사건을 통하여 재조명받게 된다. 우 조교는 1심 승소, 2심 패소, 3심 승소라는 극적인 과정을 통해 승리했는데, 이때의 2심 패소가 여성계의 시민적 연대를 야기한 것이다.[25] 이 사건은 우리 사회의 남성들이 정상적인섹슈얼리티에 대한 믿음과 성폭력의 문제틀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자각하게 된 계기이기도 하다.[26] 이와 병행하여 대학 사회는 영 페미니스트들의 노력에 힘입어 성폭력 담론의 주요 장으로 부상하는데, 이들은 법률상의 성폭력에 관한 문제제기를 통해 성폭력의 개념을 확장시키고자 하였다. 이들은 철저한 권력관계를 전제로 피해자의 주관을 강조하고 성폭력 행위의 구분에서의 연속선 개념을 도입하는 등 급진적인 면모를 보였다.[27] 그러나 대학 사회에서의 성폭력 추방 운동은 성폭력 개념에 대한 대학 내부에서의 입장 차와 더불어 정치적인 문제들의 해결 방식 등에서 갈등을 빚으며 거부반응을 불러일으키고, 성폭력의 사회적 논의는 한층 첨예하고 확장된 것으로 그 성격이 변모한다.

90년대의 반성폭력운동은 그렇게 운동사회성폭력뿌리뽑기100인위원회의 등장으로 대표되는 확장된 성폭력 담론과 헤게모니 다툼의 장을 예시하며 막을 내린다.

 

 ‘성폭력은 젠더 폭력의 문화가 만연한 사회 내에서 등장한 투쟁의 산물로써 기존의 섹슈얼리티에 지배되던 강간의 개념을 여성에게로 되찾아 오려는 도구였다. 90년대는 그러한 성폭력이 처음으로 그 존재감을 가시적으로 드러내면서 헤게모니를 위협하던 시기였다. 그러나 젠더 폭력의 문화를 없애고자 고안된 개념은 오히려 그 문화 내로 흡수되면서 폭력의 문화를 더 공고히 하게 되었고, 그것은 결과적으로 성폭력의 의미를 바로잡으려는 지난한 싸움의 출발점이 되었다. 오늘날의 페미니스트들은 끊임없이 성폭력의 의미를 확장시키려는 노력을 하고 있는데, 이러한 상황이 나타난 배경에 바로 성폭력의 이 기존의 섹슈얼리티를 통해 해석되게끔 허용한 역사적 진실이 있는 것이다.

다시, 권력이 누군가가 소유할 수 있는 성격이 아니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젠더 권력이 어떻게 자신의 모습을 유지했는가를 살펴 보면, 사실상 모든 개인과 집단이 행하는 사회적 상호작용의 문법을 기존 헤게모니가 장악하고 있었다는 데에서 젠더 권력이 영속성을 갖는 원리를 파악할 수 있다. 기존에 문제시되지 않았던 것이 문제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선 결국 기존 관념 체계에서 문제시되었던 어떤 것을 경로로 활용해 한다. 그러나 사실상 그 경로를 차용하는 과정은 기존 관념이 문제시하지 않았던 모든 것들을 정당화했던 논리들을 끌어다 놓는 과정이기도 하다.[28] 그렇게 새로이 등장한 관념은 기존 관념이 허용하는 한에서 문제시되는 것으로 그치고, 마치 정교한 과학 이론 체계가 새롭게 등장하는 현상들을 기존의 이론 체계로 설명하려는 시도를 거쳐 더욱 완벽한 이론이 되듯이 권력 관계 또한 그렇게 스스로를 강화시킨다.

 90년대 성폭력 담론은 보이지 않았던 젠더 권력에 이름을 붙여주고 문제시한다는 점에서 그 시도가 가히 혁명적이지만, 역설적이게도 젠더 권력의 문제를 설명하기 위해 여성을 설명의 초점에 맞추었다는 데에 그 한계가 있다. 여성을 젠더 권력의 피해자로 설명하는 순간 그것은 남성 우위적 세계관의 언어를 빌려오는 것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여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역설적이게도 여성을 젠더 권력의 대상으로 해석해선 안 된다. 남성을 젠더 권력의 소유자로 해석하는 것은 더더욱 안 된다.

 결국 젠더 권력을 권력 그 자체로 해석하는 것, 겉보기에 너무나도 명백한 개개인의 모습과 집단적인 피해의 사례들을 초월하여 권력의 섬세하고 미세한 작용을 해석하는 자세가 요구된다고 할 수 있겠다.[29]

 


[1] 변혜정. (2004). ‘성폭력피해 구성과 그 의미에 관한 연구. 이화여자대학교 여성학과 박사학위 논문.

[2] 국가법령정보센터. 형법」제 297법령정보.

[3] 조국. (2002). 여성주의 관점에서 본 성폭력범죄. 서울대학교 법학, 43(2), 165.

[4] Ibid.

[5] 한국여성개발원(1992), 성폭력의 예방과 대책에 관한 연구, 125. 를 조국 (2002).에서 재인용.

[6] 푸코는 모든 사회 내 기관들과 제도들이 거대한 외피를 갖는 네트워크를 형성하여 육체의 자극, 쾌락의 강화, 담론에의 유인, 조종과 저항의 강화가 지식과 권력이 주도하는 전략에 호응하면서 서로 연관을 맺어나간다고 한다. (Michel Foucault, 1981)

[7] 변혜정. (2004). ‘성폭력피해 구성과 그 의미에 관한 연구.

[8] 신상숙. (2001). 성폭력의 의미구성과 '성적 자기결정권'의 딜레마. 여성과 사회, (13), 6-43.

[9] 그렇다고 해서 90년대 이전에 여성학이 성폭력을 문제시하지 않은 것은 결코 아니다. 1980년대 중반 이후 한국 여성학에서 성이 연구 주제로 다루어지기 시작한 이래로 성폭력 문제는 이론적, 실천적 차원에서 폭넓게 문제화되었는데(배지선, 2003), 특히 1984경희대 여학생 사건등은 여성들이 처음으로 성폭력 문제 해결을 위해 연대하게끔 하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90년대의 본격적인 성폭력 담론80년대 중후반에 이루어진 노력들의 결실이라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고에서 90년대의 담론을 살펴보며 성폭력에 대한 인식이 제도권 내로 편입되는 과정, 정치 권력의 구체적인 작동 방식으로 변모하는 과정에 대해 집중적으로 살펴보는 것은 성폭력의 지식이 어떻게 젠더 폭력의 재생산에 기여했는지를 가장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이기 때문이다.

[10] 서울대학교의 모 실험실에서 1년간 유급계약직으로 근무하던 우모 조교가 상급자인 신모 교수로부터 지속적으로 불필요한 신체접촉과 부적절한 성적 발언을 들었던 사건으로, 한국 사회에서 피해자 중심주의에 입각해 성희롱이 범죄라는 사실이 입증된 최초의 사례이다. (경향신문. “93신 교수 성희롱사건이 한국사회에 피해자 중심주의 사례로 첫 등장”.2012/10/28)

[11] 민경자. (1999). “성폭력 여성운동사”. 한국여성의전화. 『한국여성인권운동사』. 한울 아카데미.

[12] 배지선. (2003). ‘성폭력개념 확장과 성폭력경험 인식 과정에 관한 연구. 이화여자대학교 여성학과 석사논문.

[13] 신상숙. (2001).

[14] 변월수씨가 귀갓길에 두 명의 남자로부터 공격을 받아 저항하는 과정에서 가해자이 혀를 깨물어 징역 1년이 구형된 사건. (여성신문. ““진실이 아니라면 내 혀를 깨물고 죽겠어요””.2013/11/29)

[15] 1991130일 김부남씨가 9세 때 자신을 성폭행했던 송백권을 살해한 사건. (KBS. “[사건파일] 나는 짐승을 죽였습니다. –김부남 사건-”. 2005/08/29)

[16] 신상숙. (2001).

[17] 변혜정 (2004). 성폭력 개념에 대한 비판적 성찰. 한국여성학, 20(2), 41-74.

[18] Ibid.

[19] 결국 어떻게 보면 성폭력특별법의 제정 과정은 젠더 폭력(Gender Violence)가 어떻게 성폭력(Sexual Violence)로 변모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설명이기도 하다. 성폭력 논의 초기에는 젠더 폭력과 성폭력 간의 구분이 뚜렷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애초에 성폭력의 용어 자체가 기존의 강간 개념이 포괄하지 못하는 성차별적 구조의 문제를 조명하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20] 한국성폭력상담소는 섹슈얼리티의 개념을 가져와 성폭력이란 강간을 비롯한 성적 희롱, 추행 등 성적인 영역에 대한 신체적 피해뿐만 아니라 그것으로 인한 심리적으로 느끼는 불쾌감, 공포, 두려움 등을 포함한다고 정의하였다. (한국성폭력상담소, 1991)

[21] 성폭력대책특별위원회. 1992/02/12 내부워크샵 자료.

[22] 변혜정. (2004). 성폭력 개념에 대한 비판적 성찰. 한국여성학, 20(2), 41-74.

[23] 김엘림 외. (2000). 성폭력 가정폭력 관련법의 시행실태와 과제. 한국여성개발원.

[24] 성폭력특별법은 당장에 가 아니었던 성폭력을 범죄행위로 정의하는 데에 일조함으로써, 여성들의 성적자기결정권과 생명권이 무차별하게 침해당하던 현상을 외적으로나마 해소하는데에 일조했다. 그러나 사실상 그 성과는 기존 헤게모니에 편승하면서 이룩한 성과라는 점에서 오히려 기존 젠더 권력을 가시화했다는 비판을 면하기는 어렵다. 여성학의 학문적 연구 성과가 현실세계의 제도와 문화를 변화시키려다가 도리어 스스로의 입장이 변화되어버리는 과정은, 모든 지식은 (설령 그것이 권력에 반하는 지식이라 할지라도) 권력을 강화시킨다는 푸코의 입장과 연관지어 생각해 볼 때 의미심장하다.

[25] 우조교 사건에 대한 여성단체들은 성희롱 규제조항의 입법 청원에 힘썼는데, 1995년에 남녀고용평등법 개정에서 성희롱규제조항의 신설 요구가 기각되고, 1996년 성폭력특별법 개정시 성희롱 규정을 포함시키려는 노력 또한 법사위에서 기각되었다. (서울대 성희롱사건 공동대책위원회, 1998) 성희롱 규제 조항은 19922월에 이르러서야 남녀차별금지 및 구제에 관한 법률남녀고용평등법에 명시되었다. (국가법령정보센터)

[26] 신상숙. (2001).

[27] Ibid.

[28] 예컨대, 여전히 장애인에 대한 교육을 진행할 때 사람들은 그들도 우리와 다르지 않은 이들이기 때문에 정당한 권리를 누릴 자격이 있다는 설명을 많이 하곤 한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이러한 설명은 우리와 다른 존재에 대한 차별은 정당하다라는 인식을 내포한다. 이러한 설명은 처음의 의도와 달리 겉보기에 비장애인과 다른 정도에 따라 장애인을 서열화하고, 그것을 정당한 것처럼 생각하게 하는 효과를 낳는다. ‘우리와 다르지 않다는 설명이 뜻하는 바는 그것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설명에서 장애인을 차별하는 힘이 결국 비장애인에게 놓여 있고, 장애인에 대한 배려를 선택적인 선행으로 바라보게끔 하는 권력의 메커니즘이 개입하는 셈이다.

[29] 혹자는 이것이 다양하고 복잡한 양상을 보이는 젠더 권력의 피해 사례들을 단일한 것으로 치부할 지도 모른다는 비판을 할 것이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각 개인을 권력의 작용 수단으로써 해석하면 다양한 교차성이 작용하는 상황에서의 권력 해석이 가능해진다. 위에서 젠더 권력의 성질에 대해 언급했듯이, 우리의 분석은 어디까지나 권력의 상승적 메커니즘에 그 초점이 맞춰져 있어야 한다.

 

커버사진 출처 : http://www.mediatoday.co.kr/?mod=news&act=articleView&idxno=1302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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