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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지식들

존재와 본질에 대해서 : 데카르트의 이원적 세계관에 대한 검토

by 고우 2019. 4.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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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데카르트의 「제1철학에 관한 성찰(Meditationes de prima philosophia)」(이하 ‘성찰’)에서 제시된 신 존재 증명이 가진 오류를 점검하고, 이를 바탕으로 존재와 관념 사이의 관계에 대해 검토하고자 한다.

 

「성찰」에서 데카르트는 방법적 회의를 바탕으로 사유함으로써 존재하는 ‘나’에 대해 밝히고, 이후 물질과 그 밖의 비정신적 존재들로 인식의 영역을 확장시키고자 ‘신’의 개념을 도입하여 명석 판명한 통찰의 결과를 진리라고 믿을 수 있는 보증인으로 신을 제시한다. 말하자면 신을 정신과 물질 사이의 간극을 메꾸는 도구로써 활용하는 셈이다. 그의 신 존재 증명은 크게 두 가지 방식으로 진행되는데, 하나는 우주론적 신 존재 증명이고, 하나는 존재론적 신 존재 증명이다. 우주론적 신 존재 증명에서는 ‘충족 이유율’을 적용하여 내 안에 있는 신 관념이 신으로부터 나올 수밖에 없음을 밝히고, 존재론적 증명에서는 ‘존재를 본질로써 갖는 것은 필연적으로 존재한다’라는 명제를 바탕으로 신의 본성상 신은 존재할 수밖에 없음을 밝힌다. 그러나 우주론적 신 존재 증명은 ‘충족 이유율’을 보증하는 존재가 신이기 때문에 순환논리에 빠질 수밖에 없다는 점, 존재론적 증명에서는 ‘최고로 완전한 존재의 관념에 존재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 다시금 신에 의해 보증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두 방식의 신 증명 모두 오류를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단순히 이것을 논박하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상정한 물질과 정신 사이의 이원론적 구분 자체에 대해 의문을 제기해야만 한다. 사실상 데카르트의 인식론적 체계는 정신과 물질 사이의 간극을 메꿔주는 신 존재 논증을 논박함으로써 손쉽게 무너뜨릴 수 있지만, 애초에 그토록 위태로운 논리의 탑을 쌓게 된 근본적인 원인을 탐구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인식에 대한 이해는 데카르트가 이야기한 ‘사유하는 존재로서의 나’에 머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사물은 인간의 사유와 독립된 존재인가? 둘 사이의 관계에 대해 논하기 위해서는 우선 우리의 주변을 가득 채우고 있는 갖가지 인공물들을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주위를 살펴 보면 우리가 우리 자신의 삶을 얼마나 많은 인공물들로 메꾸어 놓았는지 새삼 깨달을 수 있다. 그리고 그것들을 관찰해 보면, 그 모든 것들이 특정한 자세를 취하고 우리에게 특정한 행동을 유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를 테면 가위는 내가 손잡이를 잡고 무언가를 자르게끔 설계되어있고, 컵은 액체를 담고 손잡이를 잡아 쉽게 마실 수 있게끔 설계되어있다. 이것들은 애초에 그러한 목적을 가지고 만들어진 물건들이기 때문이다. 모든 인공물들이 취하고 있는 자세와 그 목적성은 인간이 자신의 의지를 그대로 형상화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위는 단순히 ‘가위’가 아니라, 우리가 ‘손에 쥐고 무언가를 자르기 쉽게끔’ 설계했기 때문에 가위인 것이고, 컵은 ‘액체를 잠시 동안 저장하고, 손쉽게 섭취할 수 있게끔’ 설계했기 때문에 컵인 것이다.

각 인공물들의 본질은 무엇인가? 그게 무엇이든 간에, 그 본질이 인간에 의해 부여되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정리하자면, 모든 인공물들은 인간 정신의 물리적 표현이다.

논의를 조금 확장해서, 이번에는 문화적 맥락 없이 주어진 인공물을 마주한 한 사람의 상황을 상정해보자. 가위를 단 한 번도 접해본 적이 없던 문화권의 사람이 어느 날 이 물건을 접한다면, 그는 이 물건의 용도를 어떤 식으로 파악할까? 아마 우리는 상상하기 힘든 다양한 용도들을 상상할 것이고, 어떤 식으로든 그것의 양태에 알맞은 기능을 부여하여 본인의 삶에 활용할 것이다. ‘가위’라는 물건은 무언가를 손쉽게 자르는 도구이고, 그러한 목적성을 가지고 설계되었지만, 그것을 전혀 처음 접한 사람에게 그것은 전혀 다른 목적성을 가진 물건이 되는 셈이다. 그리고 이 사람이 그의 문화권으로 ‘가위’라는 물건을 들고 가 자신이 발견한 용도를 전파한다면, 그 문화권에서 ‘가위’는 우리 문화권과는 전혀 다른 맥락을 가지게 될 것이다. 이 사람을 두고 ‘사물의 본질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멍청이’라고 함부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인가?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그는 이 경우에 고정된 물리적 객체에 새로운 본질을 부여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 경우에도 해당 인공물은 ‘인간 정신의 물리적 표현’이 된다. 처음 보는 사물에 새로운 본질을 부여하는 것이나, 무(無)의 상태에서 새로운 사물을 그 본질을 반영하여 창조하는 것이나, 그 노력의 정도에 차이가 있을 뿐이지 물리적 객체에 정신이 반영된다는 근본적인 원리에서는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

인공물에 대한 이러한 논의는 자연물에 대해서도 확장시켜 적용 가능하다. 즉, 그 과정을 세세하게 밝히기는 어렵다 할지라도, 어찌 됐든 우리의 눈앞에 나타나는 다양한 자연물들 또한 우리의 이해에 포섭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그것들에 그 나름의 의미가 부여되기 때문이다.

이상의 논의에서, 우리는 물리적 객체를 통해 인간 정신을 구현함으로써, 또한 그 반대로 고정된 물리적 객체에 대한 해석을 함으로써 우리를 둘러싼 사물들에 본질을 부여할 수 있음을 확인하였다.

 

그렇다면 ‘본질’은 각 개인에 의해 부여되는 지극히 상대적인 성질의 것인가? 그렇다면 그것을 ‘본질’이라고 부르는 것은 타당한가? 나는 이와 같은 ‘본질’이 어떻게 보편성을 띌 수 있는지에 관한 문제를 정신 외부에 존재하는 물질의 실존 여부와 더불어 논의하고자 한다.

내 정신 밖의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나는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가 가진 무한함, 그리고 그 풍부한 체계가 가지고 있는 논리적 정합성을 통해 간접적으로 확인 가능하다. 만약 내 관념을 형성하는 것들이 나의 내부에서만 주어진다면 나는 어떤 프로그램도 설치되지 않은 컴퓨터처럼 그저 존재하는 데에 만족하는 삶을 살았을 것이다. 나의 상상력이 아무리 뛰어난들, 외부 세계에 대한 어떠한 정보와 재료도 없이 무언가에 대한 관념을 떠올린다는 것은 불가능하고, 따라서 ‘나’라는 존재에 대한 인식 외에는 어떠한 것도 해내지 못할 것임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즉, 우리가 외부 세계를 제대로 ‘인지’하는 문제를 논외로 하더라도, 그러한 정보는 어찌 됐든 외부세계로부터 기인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외부 세계에 대한 인식은 어떻게 우리에게 보편성을 띄고 받아들여지며, 우리는 어떻게 그 대상에 본질을 부여할 수 있는가? 나는 그 수단이 언어라고 생각한다. 언어는 우리의 관념이 우리 자신에게서만 비롯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가장 결정적인 증거인 동시에, 타인과 내가 인지하는 대상을 공유하여 보편적인 본질을 대상에 부여하게끔 해준다.

만약 내가 눈앞에 있는 ‘사과’라는 물체의 이름을 말하면, 상대방은 똑같은 대상을 보고 ‘사과’라는 물체를 인지한다. 혹은 눈앞에 사과가 없더라도, 내가 ‘사과’라고 말 하면 상대방은 머릿속에 ‘사과’를 떠올린다. 상대방과 내가 ‘사과’라는 관념을 공유한다는 사실은 ‘사과’라는 단어 그 자체에서부터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언어는 세상을 비추는 거울이자, 그 세상에 대한 해석에 보편성을 부여해주는 장치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다른 대부분의 것들과 마찬가지로, 언어는 나의 ‘상상력’으로 창조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나의 관념을 이루는 체계를 제공하다는 점에서 정신세계와 내 정신 외부의 세계가 만나는 접점을 제공해주기도 한다.

이상의 논의를 종합하면, 정신 외부의 물리적 세계는 그 세계가 무한하다는 점에서 유한한 정신의 밖에 실재하며, 그 세계에 본질을 부여하는 것은 각 물리적 객체들의 물성이 아니라 인간 자신이다. 그리고 정신과 세계 사이에서 언어가 세계에 대한 정신의 해석과 본질 부여 과정에 보편성을 제공한다.

데카르트는 사물에 끊임없이 자신이 만들어 낸 본질을 부여하고 있으면서도 그러한 본질을 부여하는 사람이 자기 자신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자신의 생각을 언어로써 표현하고 타인과 공유하던 과정 자체가 존재자들에 대한 본질을 형성해 나가는 과정이었음을 깨닫지 못했다. 그는 인간의 정신과 독립하여 사물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밝혀냈지만, 그 사물들의 본질을 그 사물들 자체에서 찾음으로써, 그리하여 정신과 물질을 영원히 분리된 대상으로 바라봄으로써, ‘신’이라는 잘못된 도구를 선택하여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르게 된 셈이다.

 

데카르트가 상정한 이원적 세계관이 부실하다는 점은 이 글의 내용들만으로도 충분히 밝혀졌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의 논리 또한 미진한 부분들이 많은데, 특히 자연물에 대한 인간의 해석부터, 언어를 통해서 형성해 나가는 본질과 물리적 객체 자체가 가진 물성의 관계 등에 대한 검토가 추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을 밝히기에는 글의 분량은 턱없이 모자랄뿐더러, 애초에 나의 능력에 그 정도에 미치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글을 미래의 어느 한 시점에 다시 살펴보고 탐구를 시작할 수 있는 단초로 삼기로 마음먹으며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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